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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2-04 조회수 : 169

마태오 7,21.24-27 
 
성경 공부법: 말씀이 감정이 되게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 흙구덩이 참호 속에 한 병사가 웅크리고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내에게 편지를 씁니다.
종이에는 흙탕물과 피가 묻어 있고, 글씨는 삐뚤빼뚤합니다.
"여보... 나능 당싱을 사랑하오.
꼭 살아서 도라가겟소." 
 
이 편지를 받은 아내가 책상에 앉아 빨간 펜을 꺼내 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어머,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지.
그리고 '돌아가겠소'의 받침도 틀렸네.
남편은 국어 공부를 좀 더 해야겠어." 만약 이런 아내가 있다면, 그녀는 제정신입니까?
아니면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까?
진짜 사랑하는 아내라면 맞춤법이 아니라, 그 글자에 묻은 남편의 눈물과 핏자국을 보며 오열했을 것입니다.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성경을 분석만 하는 신학자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연애편지(성경)를 받고서, 그 문법과 문장 구조만 분석하고 있는 사람은 바보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한다고 하면서, 정작 그 말씀을 쓰신 하느님의 마음은 외면한 채 지식의 유희만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텍스트를 분석하는 차가운 머리로는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말씀이 내 삶을 바꾸려면, 그 말씀이 내 머리를 지나 '가슴(감정)'을 때려야 합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 자캐오와 부자 청년을 비교해 보십시오.
부자 청년은 예수님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 신학적인 토론을 했습니다.
그는 계명을 다 지켰다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팔아라"는 말씀 앞에서 그는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손익을 따지느라 슬퍼하며 떠났습니다.
머리는 알았지만 가슴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캐오를 보십시오.
그는 토론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집에 머무시겠다는 그 파격적인 사랑에 '감동(Emotion)'했습니다.
그 기쁨이 가슴을 치고 올라오자 계산기가 고장 나버렸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재산을 내놓습니다. 이것이 감정의 힘입니다.
사랑에 빠진 감정만이 계산을 뛰어넘어 우리를 행동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는 것은 입술의 고백이요, 지적인 동의입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실행'입니다. 그렇다면 지식에서 실행으로 건너가는 다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감정'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나치 당원이자 냉철한 사업가였습니다. 그에게 유대인은 공장을 돌리는 부속품, 즉 '비용과 이익'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가 변한 것은 어느 날 언덕 위에서 학살 현장을 내려다보았을 때였습니다.
흑백의 참혹한 현장 속에서, 그는 유독 눈에 띄는 '빨간 코트를 입은 어린 소녀'를 봅니다. 소녀가 시체 더미 속에 숨는 것을 본 순간, 쉰들러의 마음속에서 '노동력'이라는 계산이 사라지고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뜨거운 감정이 폭발합니다.
"저 아이는 내 딸일 수도 있다." 그 슬픔과 아픔이 그를 움직였고, 그는 전 재산을 뇌물로 써가며 1,200명의 유대인을 구해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평가하지만, 감정은 사람을 살립니다. 
 
천재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평생을 논리와 이성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하느님을 만난 것은 1654년 11월 23일 밤, 2시간 동안의 강렬한 신비 체험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는 그날 밤의 전율을 양피지에 적어 옷깃에 꿰매고 다녔습니다.
"철학자와 학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 확신, 감격, 기쁨, 평화." 그는 자신의 저서 『팡세』에서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심정(Cœur)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하느님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심장이 뛰는 감각으로 만나는 분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그들의 뇌가 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루카 24,32). 
 
마음이 타오르자, 그들은 피곤함도 잊고 밤길을 달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져야 손발이 움직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지식으로 저장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이 나를 향한 하느님의 피 묻은 연애편지구나!"라고 느끼십시오.
그 사랑에 감동하여 울컥할 때, 그 감정이 여러분을 실천의 자리로, 반석 위의 집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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