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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12일 _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2-12 조회수 : 116

복음: 마태 11,16-19: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아이들이 서로 놀이하며 불평하는 비유를 통해, 동시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도, 또 당신 자신도 거부한 모습을 고발하신다.  
 
요한은 금욕과 단식으로 회개를 촉구했지만 그들은 “그는 마귀가 들렸다.”(18절) 했고,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며 기쁨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먹보요 술꾼”(19절)이라 비난했다.  
 
성 예로니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풀이한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서로 불평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요한의 엄격함도, 그리스도의 자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개를 권하면 듣지 않고, 기쁨을 노래하면 응답하지 않는다.” (Commentariorum in Matthaeum II, 11,16) 
이는 곧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어떤 형태로든 거부하는 마음의 완고함을 보여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역시 덧붙인다.
“주님께서는 요한과 당신을 서로 대조시키며 말씀하신다. 
이는 두 방식이 모두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이며, 목적은 하나였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양쪽 모두를 거부하였다.”(Homiliae in Matthaeum Hom. 37,1) 
즉, 하느님께서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 백성에게 다가오셨지만, 믿음 없는 마음은 어떤 형태의 은총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9절) 
여기서 지혜란 곧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며,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지혜는 당신의 일들로 드러난다. 
요한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행적으로, 그리고 믿는 이들의 변화된 삶으로 나타난다.”(Sermo 33,3) 
따라서 요한의 단식과 예수님의 식탁 친교는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한 분이신 하느님의 지혜가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나는 혹시 하느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시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은총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오지 않는다. 
어떤 때에는 요한처럼 회개를 촉구하는 준엄한 목소리로, 어떤 때에는 예수님처럼 위로와 기쁨으로 오신다. 
그 두 길 모두가 구원의 길이다. 
 
“지혜는 그 행위로 드러난다.”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혜를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은 달라진다.
죄에서 벗어나 회개의 삶을 살게 되고, 동시에 자유와 기쁨 안에서 형제들과 식탁을 나누게 된다. 
교회는 이 두 차원을 함께 살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대림 시기,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는 마음을 열어, 요한의 목소리 안에서 회개의 부르심을, 
그리스도의 잔치 안에서 기쁨의 초대를 함께 받아들이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도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삶의 증거가 될 것이다. 
 
하느님을 향해 발돋움해야 하는 대림 시기! 
 
 
하느님의 극단적인 자기 낮춤의 결과인 아기 예수님의 마구간 탄생, 그 절절한 육화강생의 신비를 묵상하는 대림 시기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당신의 위치를 스스로 버리시고 완전히 자세를 낮추시어
우리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애틋한 사랑, 각별한 사랑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로 내려오셨으니, 이제 우리 인간 측의 호응이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향해 발뒤꿈치를 최대한 쳐들고 손을 크게 뻗어 하느님께로 발돋움해야 하는 대림 시기입니다. 
 
신앙 생활, 혹은 영성 생활이란, 내려오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 측의 적극적인 응답입니다.
내려오신 하느님을 향해 부단히 올라가는 일입니다.
따라서 신앙 생활 안에서 참으로 중요한 능력이 호응하고 공감하는 능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감의 능력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태 11,17)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 냉담함입니다.
무표정입니다.
분위기 한번 반전시켜보려고 ‘생쑈’를 다해도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별의 별 짓을 다해도 그저 심드렁한 얼굴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저 소 닭 보듯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똑같은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릇된 신앙, 왜곡된 논리에 젖어 허우적거리며 죽음의 길로 빠져들던 율법학자들, 두렵고 경직된 얼굴로 하루하루 두려움 속에 힘겹게 살아가던 바리사이들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당신에 앞서 파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새 출발을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자는 마귀 들렸다’며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참수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고대했던 메시아 예수님이 도래하셨습니다.
이분까지도 ‘먹보요 술꾼’이라며 거부합니다.
십자가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결정적 실수 그 배경에는 경직된 신앙이 있었습니다.
새로움을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최고라는 뻣뻣한 목덜미가 있었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부드러움이 인류를 구원합니다.
편안함, 친절함, 편안함, 넉넉함, 통틀어서 ‘호감’이 새 세상을 건설합니다. 
 
호감이 지닌 매력은 생명력입니다.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호감 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사람은 존재 자체로 매일 이웃들에게 큼직한 선물을 건네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에너지를 건네는 사람이며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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