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태 11,2-11: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1. “기뻐하여라”: 하느님이 가까이 오신다.
대림 제3주일은 “기뻐하라” 주일이라 불린다. 전례의 색도 자주색 대신 장밋빛으로 바뀐다. 그 이유는, 기다림의 긴장 속에서도 이미 임하신 주님 때문에 교회가 기쁨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이 기쁨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구원이 가까이 있음에서 오는 기쁨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6) 구원은 인간의 전 존재, 즉 육체와 영혼, 개인과 공동체, 인간과 피조물 전체를 새롭게 하는 총체적 치유이다. 성 이레네오는 구원의 이 온전함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온전히 살아나기 위함이다.”(Adversus Haereses III, 20,2) 따라서 대림의 기쁨은 단순한 감정적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변형의 기쁨, 곧 구원의 기쁨이다.
2. 세례자 요한의 질문: 하느님의 방식에 대한 혼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께 제자들을 보내어 묻는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선생님이십니까?”(3절) 요한은 종말의 메시아를 “심판자”, “정의의 불”로 기대했다(마태 3,12 참조).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병자를 고치고, 가난한 이를 위로하며, 용서와 자비를 선포하셨다. 요한이 혼란스러워했던 이유는, 하느님의 방식이 인간의 기대와 달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온유하시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5절) 이 말씀은 이사야의 예언(이사 35,5-6; 61,1)을 그대로 성취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심판하시는 메시아”가 아니라, “자비로 구원하시는 메시아”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해석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권능은 파괴가 아니라 치유에 있다. 그분은 죄인을 멸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러 오셨다.”(In Matthaeum homiliae, 36,2) 하느님의 권능은 온유함 속에서 드러나는 능력이며, 그분의 정의는 자비로 완성되는 정의이다.
3. 요한의 위대함: 기다림의 신앙
요한은 자신의 시대에서 하느님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7절)가 아니며, 세속적 안락이나 권력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위대함은 바로 진리 앞에서의 굳셈과 회개의 영성에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큰 이는 없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보다 크다.”(11절) 이는 요한이 새로운 계약이 시작되기 직전의 사람임을 뜻한다. 요한은 메시아를 증언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하느님 나라의 현실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 이도 요한보다 크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된 이들의 새로운 존엄을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풀이한다. “요한은 율법과 은총 사이의 다리이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이자 신약의 첫 목소리이다.”(Sermo 293,3) 요한의 위대함은 그의 행위보다, 그가 기다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믿음의 인내에 있다.
4. 인내의 신앙: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기쁨
야고보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이 가까우니 인내하십시오. 농부가 땅의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야고 5,7)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이 조급하게 당겨올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분의 구원은 하느님의 때(kairos) 안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완성된다. 그 기다림 안에서 신앙의 인내가 기쁨으로 변하는 것, 이것이 바로 대림 제3주일의 핵심이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이다. 기다림 그 자체가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Homiliae in Evangelia, 1,5) 따라서 참된 기쁨은 고난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때를 믿고 기다릴 수 있는 평화에서 오는 것이다.
5. 기쁨의 근원: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삶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분의 은총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주님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립 4,4) 이 기쁨은 세상의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무는 데서 오는 존재의 기쁨이다. 이 기쁨은 눈물과 고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원이 가까이 왔다.”(루카 10,9) 선포하셨을 때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완전한 기쁨’을 이렇게 설명했다. “형제여, 우리가 어떤 모욕과 고난을 받아도, 그 가운데 주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기쁨이다.”(Fioretti, cap. 8) 대림 제3주일의 “기쁨”은 바로 이 감사로서의 기쁨, 하느님이 가까이 계심을 아는 신앙의 기쁨이다.
✠ 맺음말
요한의 의문, 예수의 대답, 그리고 야고보의 인내는 모두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의 신앙”을 가르쳐 준다. 기쁨은 조급한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이 가까이 있음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것이다. “행복하여라,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6절) 대림 제3주일의 초대는 바로 이것이다. 의심 대신 신뢰로, 두려움 대신 기쁨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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