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신 새로운 시간이 매번 내게로 옵니다. 이 시간을 사용하기에도 벅찬데, 과거의 시간까지 안고 있으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얼마 전, 이해인 수녀님의 새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사소한 것에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지금밖에 없다’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지금이라는 시간을 제대로 볼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이라는 시간은 또다시 찾아올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더 많이 담아내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병으로 투병 중이신 선배 신부님을 찾아뵈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정말로 존경하는 분, 호탕한 성격으로 많은 분의 사랑을 받던 분이십니다. 그러나 암 투병으로 생의 마지막을 힘들게 보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후회 없이 살았다. 이제 미련도 없다.”
일주일 뒤, 신부님께서는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후회 없음은 그만큼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았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부님을 떠올리며, 나는 과연 후회 없이 지금을 잘 살고 있는지를 떠올려 봅니다.
오늘 복음은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이웃과 친척들이 함께 기뻐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8일째 되는 날 할례식에서 아이의 이름을 짓는데, 사람들은 관습대로 아버지의 이름인 ‘즈카르야’를 따르려 하고,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천사의 지시대로 ‘요한’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대 유다 사회에서 장남의 이름은 가문의 정체성을 잇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아버지나 조상의 이름을 따르는 것은 가문의 명맥을 잇는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관습과 달리 ‘요한’이라는 이름을 주장합니다. 관습을 깨는 엄청난 용기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관습보다 하느님의 뜻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쓴 행위는 단순한 작명이 아니라, 천사의 예고를 이제 온전히 믿고 순종하겠다는 신앙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순종의 순간, 닫혔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관습을 깨는 용기, 그리고 하느님께 철저하게 순종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 ‘정말 후회 없이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너의 길을 가락. 사람들이 떠들도록 내버려두라(단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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