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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2-28 조회수 : 172

딸 가진 부모님들 필독: 사윗감 고를 때 '이것' 하나만 확인하세요 
 
 
찬미 예수님.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영국의 왕 헨리 8세는 본래 교황청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aith)'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신앙보다 더 거대한 집착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왕조의 보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잇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들'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왕비였던 아라곤의 캐서린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자, 그는 하느님의 법을 자신의 뜻에 맞게 고치기로 결심합니다.
교황청이 혼인 무효를 허락하지 않자, 그는 "내 가족과 왕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교회의 법도 필요 없다"며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어 이혼을 감행합니다.
그는 이것이 가문을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가장의 선택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가정은 피바람 속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첫 번째 아내 캐서린은 쫓겨나 외롭게 죽었고, 두 번째 아내 앤 불린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참수당했습니다.
그는 총 여섯 번이나 결혼했지만, 그 과정에서 아내들은 죽거나 버림받았습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자녀들이었습니다.
딸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어머니가 처형되거나 쫓겨나는 것을 보며 공포 속에 자랐고, 훗날 서로의 종교를 탄압하며 '피의 메리(Bloody Mary)'라 불리는 살육의 역사를 썼습니다. 
 
헨리 8세는 임종 순간, 자신이 세운 교회의 의식이 아니라 가톨릭 사제를 찾으며 두려움에 떨었다고 합니다.
그가 신앙을 버리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튜더 왕조는 결국 엘리자베스 1세를 끝으로 대가 끊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가장이 하느님의 뜻(혼인의 신성함)을 버리고 인간적인 계산(아들 욕심)을 선택했을 때, 그 가정은 가장 화려한 왕궁에 살면서도 가장 비참한 지옥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인물이 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입니다.
그는 말년에 하느님의 보호하심보다 자신의 '외교술'을 더 믿었습니다.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고 가족(왕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그는 이방 공주들과 정략결혼을 하고 그들이 가져온 우상들을 위해 산당을 지어주었습니다.
"가족을 평안하게 해 주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인간적인 계산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진노하셨고, 그의 사후 나라는 남북으로 쪼개져 서로 칼을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들여온 우상이 자식들의 미래를 찢어놓은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삼위일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랑을 주는 이(Lover, 성부), 사랑을 받는 이(Beloved, 성자), 그리고 그들 사이의 사랑(Love, 성령)." 가정도 이 모델을 따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Love, 성령)을 주는 존재(Lover)이고, 아내는 그 사랑을 받아(Beloved) 순종하며, 그러면 그 삼위일체 사랑이 완성된 사이에서 새로운 생명(자녀)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엄마는 자녀와 또 이런 삼위일체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설계하신 가정의 질서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의 성령을 통한 사랑 안에서 교회가 탄생한 것과 같고, 그렇게 탄생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교회와의 관계에서 선교를 통해 새로운 자녀를 탄생시키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 모델이 가정에도 적용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가 온전한 '사랑을 주는 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수도꼭지가 저수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물을 줄 수 없듯이, 아버지도 하느님께 연결되어 사랑을 공급받지 못하면,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자기 욕심이나 강요뿐입니다.  
 
자연계를 보면 이 원리가 더 명확해집니다.
아프리카의 군대개미는 눈이 퇴화하여 앞서가는 개미가 남긴 냄새(페로몬)만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선두 개미가 길을 잃어 냄새를 놓치고 자기 꼬리를 따라 돌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뒤따르던 수만 마리의 개미 떼가 거대한 원을 그리며 뱅뱅 돌다가 집단으로 탈진해 죽습니다.
이를 '앤트 밀(Ant Mill, 죽음의 소용돌이)'이라고 합니다. 
 
가장이 하느님이라는 영적 방향(냄새)을 놓치고, 자신의 꼬리(욕망이나 불안)를 물고 돌기 시작하면, 그를 믿고 따르던 온 가족이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 공멸하게 됩니다. 
 
반면 철새들의 이동을 보십시오.
기러기 떼가 V자로 수만 킬로미터를 비행할 수 있는 것은, 맨 앞의 리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지구의 '자기장'을 느끼며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리더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날면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자기장)에 순종할 때 무리 전체가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가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자기장)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따르는 존재여야 합니다. 
 
또한, 아버지는 가정의 '피뢰침'과도 같습니다. 피뢰침은 벼락이라는 거대한 에너지를 맞았을 때,
그것을 품고 있지 않고 땅으로 안전하게 흘려보내 건물을 보호합니다. 아버지가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의 시련과 스트레스라는 벼락을 맞았을 때 그것을 가족들에게 폭발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아버지는 그 고통을 하느님께로 흘려보내(Grounding) 가정을 안전하게 지킵니다. 
 
오늘 복음의 성 요셉은 바로 이 '자기장을 읽는 아버지'이자 '가정의 피뢰침'이었습니다.
헤로데가 아기를 죽이려 할 때, 요셉은 꿈을 꿉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한밤중에 갓난아기를 데리고 말도 안 통하는 이집트로 가라니,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상식보다 하느님의 꿈(계시)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했기에,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의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은 맑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데, 노아는 산 꼭대기에서 거대한 배를 짓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쳤다고 조롱했지만, 가족들은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하여 배 짓는 일을
도왔습니다.
노아의 권위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가 맑은 하늘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경고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상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행동하는 아버지 덕분에 가족 모두가 구원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진정한 가장의 권위는 큰 목소리나 경제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느님 앞에 무릎 꿇는 그 모습에서 나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도 어린 시절, 미사 중에 기도하는 아버지 루이 마르탱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빠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성인들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빠의 얼굴에는 천국이 비치고 있었다." 
 
데레사의 아버지는 훈계로 자녀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외하는 그 '등'으로 가르쳤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녀들에게는 가장 큰 안정감이요, 따라야 할 이정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의 가장 여러분, 그리고 부모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는 단순히 개인의 신심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군대개미의 죽음'을 막고, '기러기의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가장의 기도는 가정이라는 배의 키를 잡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딸이 있고 딸을 시집보내려고 할 때, 그 사위가 될 사람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가 자기 뜻대로 가정을 이끌 것인지, 아니면 하늘의 뜻을 찾는 기도하는 사람인지.
그것에 따라 딸과 손주들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물론 딸도 그 권위에 순종하여 생명을 낳는 지혜로운 여인으로 키워야 합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 모두가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묻고 듣는 '요셉 같은 가장',
'요셉 같은 신앙인'이 되기를 청합시다.
하느님께 무릎 꿇는 아버지라야 가족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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