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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17일 주님 승천 대축일: 매곡성당 견진교리강론

작성자 : 최규화 작성일 : 2015-05-17 조회수 : 556

매곡성당 견진교리

(5월 17일 주님 승천 대축일미사 중 강론)

찬미 예수님!

본당 신부님께서 저에게 견진교리로 성모님에 대한 강론을 미사 중에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강론을 준비하면서 보니까 오늘이 주님 승천 대축일이더라구요.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었지요.

내가 아버지께 가면 누구를 보내 준다고 하셨지요?

위로자이신 성령, 진리의 영을 보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떠나가시고 제자들은 성모님과 함께 모여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립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것을 전하고 있지요. 들어볼까요.

“그들은 (사도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성모님께서는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없는 자리에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제자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이미 성령을 받았었지요.

언제입니까?

주님 탄생 예고 때에 성령을 받으시지요.

당신이 받으셨던 그 성령,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그 성령을 제자들이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오늘 강론의 서두에 사도행전의 이 말씀을 하느냐 하면 제자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던 성모님께서 지금 견진성사를 준비하고 계신 여러분과도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견진성사를 잘 준비하기 위해서 성모님과 함께,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준비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견진성사를 준비하는 우리 가운데는 오래 전에 세례를 받았던 분도 있을 것이고, 세례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견진성사를 준비하는 분들도 계실 텐데, 그런데 성모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세요?

 

『이태리에 가서 언어 공부를 하고 로마에 막 내려가서 첫 번째 시험을 치르는데, 뭐 알아듣기를 잘합니까, 그렇다고 책을 잘 읽어내기를 합니까, 아무튼 부지런히 준비를 해서 A4 몇 장을 외워서 할아버지 신부님께 마리아론 시험을 치러 들어갔습니다.

안 까먹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몇 줄 외우면 꼭 한 단어가 생각이 나질 않는 거예요. 겨우겨우 외워대고 있는데 할아버지 신부님이 중단을 시키시더니 갑자기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마리아가 누구야?”

아니, 마리아가 누구냐니? 이거 웬 질문이 이래?

나는 당신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제 실력을 훤히 꿰뚫어 보시고는 “마리아는 어머니지!” 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속으로 억울하고 분하더라구요. 마리아가 어머니인 걸 누가 모릅니까? 그런데 지금 분위기에서 그걸 물어볼 타임이 아닌데..

또 외운걸 주저리 주저리 하고 있는데 두 번째 질문이 날아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뭐하는 사람이야?”

어머니가 뭐를 하다니? 오늘 이분이 나를 골탕먹이려고 하나? 뭐 이런 질문만 하시지?

역시 대답을 못하고 가만히 있으니, “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여 기르시는 분이지!” 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거 누가 모릅니까? 어떻게 그 어려운 시험에서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지...

하도 억울하고 분해서 집에 와서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교수여도 그렇게 질문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내가 책을 보고 줄을 치고 줄여서 달달달 외운 남의 어머니가 아니라 성모님께서 정말로 나의 어머니이시고 나를 낳고 젖을 먹여서 기르신 분임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한 질문을 하셨던 거지요.

 

여러분, 여러분에게 마리아가 누구이십니까? 어머니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주셨나요?

성모 마리아는 우리를 낳고 우리를 길러 주십시다.』

 

제가 성모님과 관련해서 제일 좋아하는 성경말씀은 요한복음 19장 25절에서 27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어서 그 제자에게“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면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에게 어머니를, 어머니에게 제자를 어머니와 아들로 주고 계시지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주셨을까요?

단순히 자식이라고는 당신밖에 없는데 당신이 어머니보다 먼저 죽으니까 홀로 남는 어머니가 불쌍해서, 마음에 걸려서 제자에게 어머니를 돌봐달라고 하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에 대한 효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의 제자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지요.

당신의 가장 가까이에서 당신의 구원사업의 제일의 협력자로 살아오신 당신의 어머니가 이 제자들의 구원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당신의 지상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주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부분을 힘주어 말하고 싶었는데, 그 근거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느 책에서 분명히 보았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까 어디서 보았는지 찾아낼 길이 없어 무척 답답해 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차에 어느 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쓰신 <복음의 기쁨>이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교황님들은 중요한 책을 쓰실 때 그 마지막 부분에 성모님에 관한 부분을 쓰시면서 성모님께 의탁하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책의 맨 마지막 부분을 먼저 보았지요.

정말 제가 쓰고 싶었던 표현을 교황님께서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시더라구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주신 이유가 그의 구원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그 글을 이렇게 마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주시고 나서야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주셨는데, 여기서 사랑하는 제자는 사도 요한이라는 한 개인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서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주고 계신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성모님이 우리의 구원에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짧은 이야기 하나 할까요?

『히야친또라는 성인이 있었습니다. 도미니꼬 성인의 첫 번째 제자들 중의 하나였는데 폴란드에 있는 도미니칸 수도원을 맡고 있었습니다.

타르타르 사람들의 침입으로 인해 수도원을 떠나야 할 형편이었는데, 성인은 성당으로 가서 감실의 성체를 모셔 가기로 했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성당에서 나가면서 제대 옆에 있는 커다란 성모님 상에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때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왜 데려가지 않느냐?”

성인은 뒤 돌아 서서 성모님 상을 보고 “내가 어떻게 이 큰 성모님 상을 모셔갈 수 있겠는가?” 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러자 다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나는 왜 데려가지 않느냐?”

너무도 분명한 소리에 성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 상 앞으로 가서는 그 커다란 성모님 상을 자신의 팔로 껴안았습니다.

성인은 그 성모님 상을 함께 모시고 갈 수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그 성모님상은 성인의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었고 성인은 성체와 성모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길을 떠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이 삶의 여정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머니로 주신 성모님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십자가 앞에 서 계시는 성모님에 관한 부분을 좋아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예수님께 사랑하는 제자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주셨을 때, 사랑하는 제자는 어떻게 하는가? 요한 복음사가는 단 한줄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성모님을 어머니로 받고 바로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십니다.

우리가 사도 요한처럼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고 할 때, 여기서 ‘자기 집’은 우리가 사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루는 내적인 공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는 것은 성모님을 자기 자신을 이루는 내적인 공간 모든 곳에 성모님을 맞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아주 특별한 순간>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예수님을 우리의 사생활 안에 맞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내밀한 방 안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사제는 본당일이 끝나면 자신의 방으로 갑니다. 자신의 방으로 가면 공개되지 않는 신부님의 사생활이 있습니다.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내밀한 방이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께서 오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또 신자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직장에서나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 삶이 있습니다. 평신도로서 교회에서 활동하는 공개된 삶이 있고, 가정 안에서도 남편이나 아내로서, 부모로서의 공개된 삶이 있습니다. 이것을 넘어서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만 아는 아주 내밀한 방안으로 예수님을 초대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들이 아주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맞이하는 것도 바로 이런 식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성모님, 기꺼이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이 선을 넘어오면 안 됩니다. 그건 곤란해요. 그건 제 사생활입니다.’

이런 식이면 안 되겠지요.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신다는 것은 성모님께 제한 없이 모든 것을 내어드린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여러분의 사생활 중의 사생활에로 모셔 들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신 당신의 어머니 성모님을 우리도 우리의 삶 깊숙이 모셔들여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을 우리의 삶 깊숙이 모셔들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이 좋겠는가?

아주 간단한 것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모님을 자주 기억하고 성모님께 청하십시오.’

콘스탄티노플의 성 제르마노는 이런 말씀을 하세요.

『호흡이 몸이 죽지 않았다는 확실한 징후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마리아에 대한 잦은 기억과 사랑스러운 간구는 영혼이 죄로 인해 죽지 않았다는 확실한 표징이다』.

우리가 성모님을 자주 기억하고 성모님께 청하다보면 우리는 점차로 성모님을 닮고 싶어질 것입니다.

성모님의 여러 가지 모습이 있고 덕행이 있지만 견진을 준비하고 계시는 여러분에게 이런 모습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성모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분입니다.

성자께서 사람이 되어 오실 때 그 어머니가 되시도록 미리 준비하신 분입니다.

성모님께서 어떤 자격조건을 갖추시고 잘 사셨기 때문에, 그럴만하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택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견진성사를 받고 나면 더욱더 앞장서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될 텐데, 이러한 사명 앞에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도, 주저할 필요도 없고, 또 자신이 자격조건을 갖춘 것처럼 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 앞서 하느님께서 먼저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성모님께도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를 부르시는 분은 또한 우리를 준비시켜 주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심을 받은 성모님은 이것에 대한 동의를 표명하시지요.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구원사업에 협력해달라고, 하느님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되어달라고 하시는데, 이러한 요청을 하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성모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저에게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씀하시지요.

성모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신 것은 마지못해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자유로운 응답을 하신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그렇게 응답하도록 다 만들어 놓으신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렇게 응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이 질문 앞에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를 돕는가 아니면 우리를 강제하는가?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가 최선의 것을 선택하도록 도와 주시는가? 아니면 당신이 계획하신 것을 이루도록 우리를 조종하는가?

당연히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를 돕지요.

성모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의 움직임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사명을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이 때 하느님께서는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시겠지요.

여러분은 응답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거지요.

 

저에게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신부님,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돼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봉사를 하십시오.’

계속해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돼요?

계속해서 봉사를 하면 되지요.

봉사라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인 거지요.

‘주님, 당신께서 주신 것을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표현을 하는 겁니다.

이런 응답은, 이런 표현은 당연히 하느님의 또 다른 은총을 부릅니다.

우리가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 표현하면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당신의 은총을 나누어 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그 부르심에 합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족하고 보잘 것 없지만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시고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으시면서 ‘예’라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견진을 받는 나를 하느님은 어디로 부르시는가? 내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시는가? 하는 것을 먼저 잘 살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처럼 믿음을 가지고 겸손되이 응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성모님의 응답은 주님 탄생 예고 때에 단 한번의 응답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오늘 여러분에게 가장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책임감있는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예’라고 입으로 드린 동의를 삶 안에서 일평생 살아가신 분이십니다.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성모님의 모습을 두 번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에 말씀드린 십자가 앞에 서 계시는 어머니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 부분인 카나의 혼인잔치에서입니다.

혼인잔치에서 뭐가 떨어졌지요?

술이 떨어졌습니다.

성모님은 누가 와서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께 나아가서 그 사정을 말씀드립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세요?

‘아, 예,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도와줄께요.’ 이렇게 말씀하시나요?

아니지요, 예수님은 어머니의 요청에 난색을 표현하시지요.

이런 아들 예수님 앞에 성모님은 믿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그리고 결국에는 물이 포도주로, 아주 좋은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의 주님께 그것을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어려운 날에 성모님께 청을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성모님의 활약으로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을 앞당긴 것도 중요하지만, 요한 복음사가는 이 일의 끝부분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성모님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대한 믿음에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루카 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실 때 군중 가운데 한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성모님에 관한 부러움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이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예수님의 이 말씀이 성모님께서 행복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을 가장 잘 하신 분은 누구일까요?

성모님이시지요.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에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하고 응답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여 나으시잖아요.

성모님께서 당신의 어머니이기에 행복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분이기에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이것을 잘 아셨고 그래서 성모님의 행복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지를 고쳐서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로 불림을 받은 그 처음부터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당신이 지니는 특권을 누리고 앉아계시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바로 당신 자신을 ‘주님의 여종’이라고 말씀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 안에 이루어지기를 바라시지요.

아무 생각없이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묻고 본인이 이해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이해를 하고 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마음에 담고 하느님께 동의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모님의 동의는 단 한 번의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살아가면서 당신이 말씀하신 동의를 살아가시려고 노력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잘 아셨고, 당신 구원 사업의 최고의 협력자인 당신의 어머니를 십자가상에서 우리 믿는 모든 이의 어머니로 주고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상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당신의 어머니에서 믿는 모든 이의 어머니라는 새로운 사명을 받으시는 것이고, 이것은 성실하신, 책임감 있으신 성모님이 아들 예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으시는 순간인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을 따라서 책임감 있고 성실한 어머니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답만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린 동의가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삶 안에서 계속적인 협력을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용기를 내서 첫 출발을 하는 것은 그래도 쉽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그것을 지켜가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지요.

성모님처럼 꿋꿋하게 흔들림 없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설마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니까 아주 평탄하고 아주 명확한 길을 가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는 성모님께서 가신 신앙의 길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도 희미한 신앙의 빛 안에서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는 당신에게 약속된 모든 것이 부정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었고, 더 이상의 희망을 기대하기는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희망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도 쉽고 편안한 길을 걷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처럼 언제나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우리 신앙인의 길을 묵묵히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께 나아오도록 초대하시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어머니이신 성모님, 우리의 곁에는 성모님이 계심을 기억하고 성모님과 함께 우리에게 허락된 이 삶을 충실히 살아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렵고 앞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성모님께서 하신 것처럼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한발 한발 성모님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실하신 어머니께서 지금 여러분과 함께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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