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사도 5,12-16; 묵시 1,9-11ㄴ.12-13.17-19)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유독 눈에 뜨이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그 자리에 없던 토마스가 믿지 못하자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토마스가 말한 내용을 다 듣고 계셨겠지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소.”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라면 제자의 이 말에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화도 나고, 모른 체 할 것이 아니라면 당장에 나타나서 그의 잘못을 꾸짖고 믿음을 갖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여드레가 되고서야 다시 나타나십니다.
나타나셔서 토마스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시고 손을 넣어 보라고 하시며 당신의 제자가 의심을 거두고 믿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왜 바로 나타나시지 않고 여드레가 지나고 나서야 나타나셨을까요?
어떤 책에서 이런 내용을 본 일이 있습니다.
어떤 신학생이 사제성소의 길을 포기할 마음을 가지고 한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이 신부님께서 자세한 이야기도 듣지 않고 지금은 그걸 이야기할 수 없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그 신부님께 뭐 급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다음날 학생이 찾아와서 어제 무슨 마음이 있었는데 자고 난 뒤에 그 마음이 가라앉았다고 말씀을 드렸고 그래서 그 학생은 순간의 잘못된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입 밖으로 그것도 다른 이 앞에서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더욱더 굳히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자신이 확실히 맞고 그래서 다른 이의 객관적인 조언은 별 도움이 되지 않지요.
그런데 내 안에서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그 확신이 포장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마음도 자신의 확신에로 기울어 있는 것이 아니라,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지요.
성소포기란 아주 중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다시 오란 것은 정말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의 처신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정말 누구에게로 가 있는가 하는 것이 명확해 집니다.
토마스의 그릇된 자기 확신이 그 안에서 더 이상 판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지요.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를 당신께로 끌어들이기 위한 하느님의 술책이 아니지요.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우리의 편에 서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를 위해 여드레라는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가 나타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하느님의 자비를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드레 뒤에 나타나셨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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