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반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장래희망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대통령, 장군, 과학자, 선생님, 소방관 등등의 장래희망을 이야기했지요. 그때 저는 “신부요.”라고 저의 장래희망을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놀려대는 것입니다.
“너는 남잔데 어떻게 신부가 되니?”(신랑 신부의 ‘신부’로 생각했나 봅니다)
“네가? 너 같은 애가 어떻게 신부님이 될 수 있어?”(그렇게 모범적이지 않았던 제가 신부님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나 봅니다)
“신부님은 결혼할 수 없어. 그런데 너 여자 좋아하잖아.”(여학생들과 친했던 저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의 적극적인 반대로 크게 위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장래희망을 이야기하라고 할 때, 다른 친구들처럼 과학자, 선생님 등으로 평범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의 장래희망을 숨기다보니 실제로 신부님이 되고자 하는 희망이 점점 줄어들더라는 것입니다. 신부님 되는 것이 가장 멍청하고 바보스러운 선택으로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고등학교 때에 하나의 특별한 사건으로 다시 신부님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고 지금 현재 초등학교 때의 장래희망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남들의 시선에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다면 저의 꿈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남들이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들의 시선에만 신경쓰다보면 스스로를 속이는 모습으로 살게 되면서 거짓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헤로데 영주를 만납니다. 사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의로움을 잘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의 말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귀 기울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맞아들인 것을 비판하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뒤에, 헤로디아 딸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건네주게 됩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한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남들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한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남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다 보니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복음의 시작에도 나오듯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라고 말하면서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남들의 시선에만 신경 쓴 행동이 스스로를 더욱 더 힘들게 만든 것입니다.
남들의 시선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시선이 중요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은 자신의 올바른 신념을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기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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