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0, 46-52(연중 30주 주일)
오늘은 연중 30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제 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어, 그들을 모아들이어 곧은길을 걷게 할 것인데, 그들 중에는 눈 먼이, 다리 저는 이 등도 있으리라고 말합니다(예레 31, 7-9).
<제 2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대사제가 되는 영광을 아버지께서 주신 것으로 말하며, 그리스도는 “멜키세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라고 말합니다(히브 5, 1-6).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지 장님 바르톨로메오의 치유를 통해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눈먼 이의 치유는 어둠 속에 있는 이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을 표상하며, 예언자들에 따르면 메시아의 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이사 35, 5; 시 146, 8; 마태 11, 5).
그렇다면, 누가 눈 먼 이인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이’(4, 13; 7, 1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8, 18),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6, 52; 8, 17), ‘따로 설명해주어도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9, 32)이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먼 거지 바르티메오는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혹 지금 우리도 가야 할 길 가에 그냥 앉아 있지는 않는지요?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 47)
그분이 지닌 메시아의 권능을 믿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 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동전그릇도 버려두고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마르 10, 50).
그런데 오늘 움치려 나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겉옷은 무엇일까? 나에게는 하느님의 일을 가리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내 생각’이 바로 ‘겉옷’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나 자신의 이기심’이 바로 던져버려야 할 ‘겉옷’입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거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 5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 자신이 그것을 알도록 우리의 진정한 원의를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청하기 원하십니다. 당신을 신뢰하고 의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진정 원해야 하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거지 장님은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 51)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린애가 잃어버린 엄마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하듯이, 하느님을 보고 싶은 것이 바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아닐까요?
그리스어로 ‘보다’(αναβλεπω)라는 말은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항상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눈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어놓으신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여 백인대장처럼, 우리가 “참으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마르 15, 39)라고 고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곧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새롭게 본다.’는 것은 빛의 세계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곧 빛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눈입니다. 다름 아닌 믿음의 눈이요, 믿음으로 세상과 형제들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 52)
이제는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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