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등산을 좋아해서 산을 많이 다녔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등산을 다녀온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입니다. 그래도 산을 좋아했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등산을 하겠다고 늘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언젠가 충청도 지역에 강의가 있어서 하루 전에 가서 강의를 할 본당 근처에 있는 어느 산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높지 않아서 산책하듯이 정상까지 갈 수 있다는 말에 힘차게 발을 내딛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등산을 하지 않아서 그랬을까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 순간 정상에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정상을 오르는 두 갈래의 길에서 이런 이정표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리 아픈 길. 그러나 빠른 길.’, ‘다리 편한 길. 그러나 느린 길.’
저는 너무 힘들어서 ‘다리 편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편안하게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내려올 때에는 ‘다리 아픈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짧은 거리였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금세 내려올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식으로 두 갈래 길이 펼쳐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힘들지만 짧은 길, 편하지만 먼 길처럼 말이지요. 두 길 모두 무조건 나쁘다 할 수 없습니다. 장단점이 늘 있습니다. 문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힘들다고 불평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편해서 좋고, 또 시간이 짧다면서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내게 가장 좋은 순간들이 찾아옴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순간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라는 위대한 현현은 우리에게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는 삶의 신비를 흘끗 보여 줍니다. 흘끗 본 것만을 통해서도 베드로는 큰 감동을 얻었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이 너무나 좋으니 그냥 이곳에 눌러 살자는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구름 속에서의 소리로 명령하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주님께서 이끄시는 길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순간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주님의 말씀이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어도,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때 분명히 나의 길이 가장 좋은 길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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