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신앙생활에 대한 어려움을 느끼시는 어떤 형제님께서 이 성경 말씀을 이렇게 바꿔 말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안 돼.’였다.”
안 되는 것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계명이 족쇄이고, 자신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요? 자기 뜻대로 되는 것만 무조건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 제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습니다. 아래 앞니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어머니께 이빨이 흔들린다고 하자,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튼튼한 이빨이 새롭게 나온다면서 말이지요. 저는 무서움과 두려움에 뽑지 않겠다면서 대항했습니다.
제가 원하지 않는다고 어머니께서 “그래, 네가 이렇게 싫어하니까 뽑지 말자.”라고 하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말로 설득하시다가 소용이 없자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꼭 움켜쥐고는 앞니를 뽑으셨습니다.
분명히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오히려 이빨을 뽑아주지 않는 것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치를 뽑지 않으면 덧니가 나서 나중에 교정하느라 더 힘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아시기 때문에 제가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이빨을 뽑으셨던 것이지요.
이렇게 원하지 않아도 사랑한다면 때로는 고통과 시련으로 다가오는 일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안 돼’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어쩌면 이 ‘안 돼’가 우리를 위한 사랑은 아닐까요? 그리고 이 사랑을 아는 사람만이 “네”라면서 순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순명하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라는 천사의 인사를 받기에 합당했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순명으로 인해 우리가 커다란 선물을 받습니다.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며,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앞에 ‘안 돼’라는 상황이 계속 주어질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뜻에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나쁜 길로 이끌지 않습니다. 순간에는 이해하기 힘든 사랑이지만 분명히 더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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