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카로 파스카를 맞이하기!
피정 파견미사 집전을 부탁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복음이 오늘 말씀인 ‘되찾은 아들의 비유’였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는데 시작 부분인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루카 15,11) 라는 말씀이 제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세리, 죄인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해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하나’가 아니라 ‘둘’ 있었다.”고 하시는 부분이 고맙고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신 앞에서 투덜거리고 있는 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너희도 하느님의 자녀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복음의 중심 부분을 가지고 강론을 쓰고 싶었지만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그 말씀에 머물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서 제가 떠올린 말은 ‘파스카’, 곧 ‘건너감’입니다.
사실 오늘 제 주의를 끌었던 부분은 작은아들이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고, 그를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면서 그저 기쁘게 다시 아들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잘 알면서도 제 마음은 솔직히, 아버지가 작은아들에게 회개의 표시로 요청한 것이 없나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이래도 되나? 그러면 다른 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텐데.’ 하는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제가 ‘하느님 아버지는 이런 분이라고, 하느님이시라면 이렇게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아버지는 ‘이런 분’이 아닙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이 부분에 대해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2코린 5,19).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화해하러 온 사람의 잘못을 따져 짐을 지워서는 안 되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에 있어서, 저의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건너오라고 초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 주간을 지내면서 주님께서는 나를 어디에서 어디로 건너오라고 초대하시는지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파스카를 준비하는 좋은 길 중의 하나는 주님께 초대받은 파스카를 지금 사는 것이 아닐까요?
글. 최규화 요한 세례자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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