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 겸손의 덕을 완벽하게 갖추기란 사실 쉽지 않습니다. 벤저민 플랭클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겸손이라는 미덕을 완전히 습득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겸손한 척하는 법을 배웠다.”
겸손을 가장한다는 것, 어쩌면 진정성이 없기 때문에 가짜 겸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플랭클린은 우리가 쓰는 가면으로 인해서 진짜 자신도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제대로 익히기 힘들지만 그런 시늉들이 반복되면서 점차 내면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이 말에 예전의 제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제 모습은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머니가 깨워주기 전에는 일어나기 힘들었고, 청소나 방 정리도 하지 못했습니다. 게을러서 미루기 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신부님이 되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으로 인해서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앞서서 하려고 했고, 성실한 모습을 보이려는 척을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살다보니 어느 순간 사람들이 제게 성실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현재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고 있으며, 20년 가까이 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불러만 준다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강의를 합니다. 예전의 게으른 모습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실한 척 했던 삶이 저의 원래 모습인 것처럼 비춰집니다.
지금의 자기 모습에 대해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척 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때 자기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원하는 모습이 고개를 내밀면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불가능한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죽음이 부활의 영광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미리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로 자신감을 잃지 않게 하려는 그래서 고통과 시련에 대해 좌절하지 않고 항상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을 누리게 하려는 주님의 배려였습니다.
자신감을 잃는다는 것은 내 인생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그러한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이렇게 항상 배려해주시고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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