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암연구소에서는 스트레스가 생체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용 쥐를 활용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같은 조건에서 양육된 실험용 쥐를 두 집단으로 나눠서 바닥에 천기 충격 장치가 포함된 투명한 유리 상자에 넣었습니다. 그 후 한 집단에는 일정 시간마다 고통을 유발하는 전기충격을 주고, 또 다른 집단은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맞은 편 쥐들을 관찰할 수 있게 배치했습니다.
하루 종일 전기 충격을 받았던 쥐와 오로지 유리창 너머로 고통 받는 동료 쥐를 관찰하던 쥐들의 스트레스는 과연 어떠할지를 살폈습니다. 16시간의 실험 끝에 탈진한 쥐가 나왔습니다. 어떤 쥐들이 탈진했을까요? 하루 종일 전기 충격을 받은 쥐가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탈진했을 것 같지만, 뜻밖에도 관찰 조건에 있는 쥐들이었습니다.
인간 역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가장 큰 스트레스 속에서 힘들어할 것 같지만, 사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의 스트레스가 더 크다는 것을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나 그 사람을 보고 있는 사람이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고통 속에 있다고 자기 자신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옆에 있는 사람도 고통을 줄이는데 함께 노력해야 하는 당연한 이유를 찾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함께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서 주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주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나 그 옆에서 고통을 보면서 함께 해주는 사람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 학자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면서 불쾌하게 생각하지요. 그들은 고통 받고 있는 중풍 병자와 함께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중풍 병자의 고통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 속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 이 세상입니다. 이는 그만큼의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더욱 더 그들의 아픔에 함께 하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그들의 고통이 치유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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