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때에 은경축을 맞이하는 은사 신부님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학생으로 10년, 사제로 25년을 보냈다는 것, 따라서 ‘아~ 저 정도 나이가 되면 삶의 지혜가 대단하겠지?’라는 생각하면서 ‘나도 저 정도 나이가 되면 그렇게 되겠지.’라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시간이 정말로 빠르게 흐릅니다. 글쎄 저 역시 나이 50을 넘기면서 은경축이 멀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지혜는 어떤가?’라고 질문을 던지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어렸을 적의 철부지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려서 더 형편없이 변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막연하게 나중을 기대해봐야 결국은 실망만 돌아오게 됩니다. 오히려 그 나중을 기다리는 것보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더 충실한 것이 내 자신에게 훨씬 더 유익했습니다. 나의 기대를 완벽하게 채워줄 미래가 없음을 이제야 겨우 깨닫습니다.
한 회당장이 예수님께 죽은 딸에게 손을 얹어달라는 청을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딸이 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 가시는 길에서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댑니다. 이 여인 역시 예수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연한 기대가 아닌 구체적인 기대였습니다. 그러나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군중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이 믿음의 차이를 생각해봅니다.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굳은 믿음을 보였던 회당장과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믿음이 우리들이 지향하고 따라야 할 믿음인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있기에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쉽게 포기하고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막연한 기대를 안고 살아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 대한 구체적인 믿음, 이 믿음이 바로 용기이며 우리를 구원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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