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뒤뚱거리며 걷고 있습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혹시라도 잘못 넘어질까 봐 불안합니다. 이런 예상대로 아기는 얼마 걷지 못하고 넘어집니다. 그리고 넘어질 때 아팠는지 큰 소리를 내며 웁니다. 하지만 잠시 뒤 아기는 울음을 멈추고 또 다시 일어서서 걸어보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기의 부모는 어떻게 할까요? 만약 아기가 제대로 걷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제 더 이상 스스로 걷지 못하도록 부모가 늘 안거나 업고 다닌다면 어떨까요? 이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아기가 걷지 못하게 해서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보호가 진짜 사랑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넘어지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넘어지더라도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그냥 놔두고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함께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고통과 시련이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진짜 사랑일까요? 아니면 어렵고 힘든 상황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있도록 진짜 사랑일까요? 어떤 형제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제가 이런 아픔을 겪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이를 그냥 보고만 계신다면 저는 더 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고백을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갓난아기가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지켜만 봐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떠올리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내가 원하는 것만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것만을 주시는 하느님이심을 말이지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충분히 이겨내면서 많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씨 뿌리는 사람 비유 말씀을 설명해주시면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으로 비유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이 최고임을 받아들이면서 그 사랑을 늘 품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을 늘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세상의 기준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처럼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데 더욱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그 말씀은 분명히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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