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일
지난 주 복음의 내용이 재물에 대한 가르침이었다면, 이번 주는 시간(기다림)에 대한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제시하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혼인 잔치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태도, 두 번째 비유는 언제 도둑이 들지 모르는 모르는 집주인의 태도, 세 번째 비유는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집을 관리하도록 책임 맡은 관리인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비유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유들 모두 불확실하고 막연한 미래의 어떤 기다림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은 이런 불확실하고 막연한 미래의 기다림 속에서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8) 기다림 속에서 해야 할 것은 바로 주님의 현존을 맞아들일 준비 행위입니다. 이 준비 행위는 어두움을 비추는 등불이 상징하듯 우리의 믿음에 근거합니다. 믿음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구를 거슬러, 불확실한 미래를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 기다림은 미래의 시점을 가리킬 뿐 아니라 현재의 시점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기다림은 막연한 것만은 아닙니다.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삶이 쌓이면 확고한 희망이 자리잡게 됩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현재의 순간에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요한 묵시록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주님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사건과 만남, 생각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문제는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에 지쳐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내고”(루카 12,45) 있지는 않습니까? 권력에 대한 남용,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무절제, 시간의 허비와 게으름 등은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다만 기다림 속에서, 이런 본능에 지배되는 삶을 사느냐 아니면 이것을 극복하고 주님을 향한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글 이승환 루카 신부(수원교구 능평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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