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남편이 아내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나무로 만들면 나막신이라고 하지. 고무로 만들면 고무신, 털로 만들면 털신이라고 해. 그렇다면 사랑으로 만든 신은 무엇일까?”
아내가 답을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남편은 아내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당신이야.”
맞습니다. 나의 배우자인 ‘당신’은 사랑으로 만든 신입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진정한 ‘당신’이 되는 것이지, 세상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것들을 통해서는 절대로 ‘당신’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자매님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이분께서는 자신이 하는 일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를 만나면서 고민에 빠졌지요. 내 배우자를 사랑하느라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을 내 삶의 50%로, 나머지 50%로 사랑을 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구분하면서 일과 남자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얼마 뒤에 “어리석은 생각이었어요.”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더군요. “사랑은 언제나 100%로 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일에 대한 사랑 50%까지 합해져서 내 삶의 지평이 150%로 늘어나는 것이었어요.”
한 남자를 사랑하면서 표정이 밝아졌고 일을 더욱더 기쁘게 할 수 있었답니다. 자연스럽게 직장 안에서의 평가도 더 좋아졌습니다. 사랑을 통해 삶의 지평이 늘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착각하지 않나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사랑을 늘 강조하셨던 예수님이기에 “안 된다.”라고 말하면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냐면서 따질 것이고, “율법에 있으니 된다.”라고 말하면 “그러면 이제까지 당신이 말한 사랑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따질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내를 버리려고 하는 남편은 아내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라면 혼인을 해소하는 법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그런 법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길 것입니다. 즉, 바리사이의 질문 안에는 사랑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성실한 관계를 맺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많은 배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 역시 간직해야 합니다. 이 사랑을 간직하고 실천하십시오. 내 삶의 지평이 훨씬 더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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