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는 어디에 있지!
가끔 신자들의 모임에 참석하거나 식사에 초대를 받는 경우가 있다. 그 때 신자들은 예수님의 대리자인(?) 사제가 왔다며 환한 미소로 나를 반기면서, 가장 좋은 좌석이나 중심자리로 인도한다. 하지만 그런 신자들의 사랑과 호의가 어색하고 불편할 때도 있다. 내게는 신자들로부터 그런 환대를 받을 만한 위치도 권위도 없다는 것을 나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모임에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신자들이 나의 자리를 확보해주지 않거나 높은 자리(?)로 인도해주지 않으면, ‘신자들이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겸손한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것을 어려워할까? ‘자신을 낮추게 되면 상대가 자신을 무시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하고’ ‘이제까지 자신을 낮추어 본 경험이 없으며’, ‘상대를 자신의 협력자로 수용하기보다는 경쟁해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거나’ ‘가진 것이 없는 자신의 실체가 들통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자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겸손하게 삶을 사는 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하고 거룩한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적대 관계(어디와 적대관계인지요? 서로?)에 있는 아프리카 수단의 지도자들을 초대하여 그들과 함께 피정을 하셨고, 마지막 날에는 내전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기원하며, 그들의 신발에 친구(親口)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교황님의 겸손과 사랑의 행위에 우리는 모두 감동했다. 교황님은 종처럼 자신의 모습을 낮추셨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로 인해 진정으로 그분을 높은 분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겸손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오히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을 더욱 낮추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집회 3,17)라는 말씀처럼, 겸손하면 주님의 은총을 더 충만하게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한계를 지닌 인간이 되시는 겸손함을 보여주셨고,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종과 겸손의 모습을(필리 2,9 참조)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을 낮출 때 주님과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하느님과 일치를 원한다면 자신을 낮추는 삶을 지향해야한다.
글 노희철 베드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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