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함께하려면
이전에 본당에서 ‘예비신자반’을 시작하면서, 예비신자들에게 입교 동기를 물은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 “기도를 통해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예수님을 더 깊게 알기 위해서” “종교를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기에” 등의 답을 했습니다. 어찌보면 예비신자들은 하느님을 통해 자신들 각자의 원의가 어느 정도 충족될 것이라는 기대로 성당에 발을 들여놓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비신자들의 그런 소박한 바람과는 달리,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분명하고 엄격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촉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가족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맥이 빠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통해 삶의 활력과 기쁨과 희망 그리고 현세적인 유익과 평온을 고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우리에게 희망과 편안함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두려움과 걱정거리를 제공하시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가족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도 버리고, 게다가 그 무거운 십자가마저 지라고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 “도대체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참조) 하는 반응을 보였던 제자에게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우리의 바람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편한 길은 아닐 것입니다. 적당히 기도하고, 미사참례하고, 성사생활을 하며, 자선을 베푸는 것만으로 완성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현자들은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지혜 9,13) 하며 하느님의 깊은 신비에 대해 고백하며 고뇌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참다운 일치 즉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분 안에’(요한 14,20 참조) 있기를 갈망하기에 가능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그저 예수님을 우리의 원의를 충족시켜 주시고 문제와 아픔을 해결해주는 분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알라딘과 요술램프’에 나오는 지니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이며, 버튼 하나로 모든 것을 출력시켜 주는 컴퓨터와 같은 존재로 전락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로 일치됨을 추구하며, 그분이 보여주신 숭고하고 거룩한 삶을 따르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회피와 거부의 자세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수용하고 인정하며 함께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글 노희철 베드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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