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바보스러운(!!) 경제 논리
요즘 우리 한국 사회는 경제적인 가치를 모든 가치의 중심으로 평가하는 세상으로 바뀌고 있는 듯하다. 오랜 임상시험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방법이 개발되어도, 신기술이 도입되어 생활의 편리함이 제공되어도, 국가 간의 무역 협정으로 삶의 질이 향상되어도, 국회에서 새로운 법이 신설되어 인권과 평등의 가치가 높아져도, 그 결과는 모두 ‘어떤 경제적인 이익이 창출 되는가’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인간 삶의 행복과 가치보다는 경제적인 효과와 그로 인한 부가가치에만 집중하고 있다. 정신적인 가치의 중요함을 역설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물질적인 가치가 더 우위에 있는 것 같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되찾은 양의 비유’(루카 15,17)를 말씀하신다. 목동들은 매일 양들이 풀을 뜯어 먹게 하려고 광야로 나간다. 그런데 양들은 자신들의 무리가 이동하는 방향을 의식하지 못한 채, 눈앞에 보이는 풀에만 관심을 둔다. 눈앞의 풀을 뜯어먹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무리로부터 이탈하여 결국 혼자 광야에 남게 된다. 그때 목동은 무리에서 이탈한 양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러 갔다가 오히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이리들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목동들은 ‘경제적인 논리’ 즉 한 마리를 포기하고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만을 안전한 우리로 인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길을 잃은 양을 찾으러 돌아다닌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이런 처신은 참으로 바보스러운(?) 행동이다. 물론 ‘적과 싸우러 갈 때 이만 명을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를 헤아려 보라.’(루카 14,31 참조. 지난 주일의 복음)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경제적인 논리를 잘 아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와 한 마리를 비교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장 길을 잃고 헤매는 양 한 마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시다. 그분은 각 사람들의 능력이나, 우선순위를 생각해서 누구를 선택할까 고민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두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그 존재만’을 생각하시고 다가가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한 분이신 당신과 다수인 우리를 ‘일 대 다수’의 관계로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우리의 관계를 ‘일대일’의 개별적인 관계로 대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어느 것이 최상의 선택이고 효율성이 높은 것인가를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 있는 형제들과 함께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잡한 현대의 계산법을 따르기보다는 단순하지만 아름답고 소중한 예수님의 계산법을 따를 수 있으면 좋겠다.
글 노희철 베드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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