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신부님 옆에 타면 안 되는 거예요?”
사람들을 제 차에 태우고 어디를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제 차의 빈자리를 찾아 앉았지요. 그런데 한 분이 조수석에 앉으려다 말고 옆에 타면 안 되냐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제가 뭐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왜 안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요? 조수석 자리에는 그 누구도 앉을 수 없도록 짐이 가득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글라스, 우산, 책과 노트, 그 밖에 여러 전선까지 이 자리에 있으니 사람이 도저히 앉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사실 혼자 살고 있기에 누가 제 옆에 탈 일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조수석 자리가 편안하게 하나의 짐칸처럼 사용된 것입니다.
물론 얼른 이 짐들을 트렁크에 쏟아부은 뒤에야 이 자매님께서 자리에 앉을 수 있었지만, 이 경험을 통해서 내 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혹시 내 마음에도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공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욕심으로 인해서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찾기 힘들어집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보여 주셨지만, 그 사랑이 점점 흐려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내어주는 것, 그래서 내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섣부른 판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한구석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향유 옥합을 들고 한 여인이 서 있습니다. 잠시 뒤 그녀는 예수님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최고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런 사랑을 표현하는 여인에 대한 칭찬을 아무리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는 전혀 칭찬하지 않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을 보기보다는, 죄인이라는 사실 하나에만 주목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루카 7,39)
여자를 판단하는 것을 뛰어넘어 이제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으신 예수님까지 판단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자기 마음을 내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도 자신들의 마음을 내어드리지 못하고 판단합니다.
섣부르게 판단하고 반대하기보다는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내 마음 안에 소중히 모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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