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2일 [연중 제25주일]
오늘 전례의 주제는 ‘재물’에 관한 것이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인간이면 누구나 피하기 어려운 재물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재물 사용법에 대해 몇 가지 권고를 하고 있다. 재물을 잘 사용하여 진정 하늘나라에 자신을 개방하고 준비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계시다.
제1독서: 아모 8,4-7: 가난한 사람들을 돈으로 부려먹는 자들에 대한 경고
1독서는 예언자 아모스 시대에 여로보암 2세의 통치하에서(BC 783-743)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있던 이스라엘의 참상을 그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려고 하였다. 이 때에 양을 치던 아모스가 그들을 호되게 비난하며 질책을 퍼붓는다. 제1독서의 내용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압박하는 전형적인 착취형태로서, 이 같은 상황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더욱 심각하다.
수많은 국가에서 자행되고 있는 착취형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아모스의 외침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황을 거슬러, 자신들이 압박의 도구가 되지 않고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형제애’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지상재화의 ‘의미’를 재조명하라고 하는 촉구라고 할 수 있다.
복음: 루가 16,1-13: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오늘 복음에서 청지기는 어떻게 그런 부정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 주인에게 들켜 큰 벌을 받을 수 있는 나쁜 짓임에 틀림없다. 당시의 청지기는 넓은 토지를 관리하고 주인에게 정기적으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땅에서 나오는 결실을 높은 이자로 빌려주고 자신들의 보수를 챙겼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지기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이용하여 빚진 자들의 빚문서를 허위로 기재한다. 기름을 빚진 사람에게는 50%를 감해주고, 밀을 빚진 사람에게는 20%를 감해준다. 이렇게 이 약은 청지기는 빚을 삭감해줌으로써 개인적인 수익을 거둘 뿐 아니라, 빚진 사람들의 환심도 산다.
주인은 이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했다고 칭찬을 한다(8절). 이 청지기는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가지 이익을 얻고 있다. 우선은 개인적인 벌이를 할 수 있었고, 또 그 빚진 사람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집주인은 이 두 번째 사실에 대해서 칭찬을 하고 있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절)는 것이다. ‘세속의 자녀들’은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의 환심을 얻는데 어째서 착한 이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려울까? 아마도 자기 자신과 또한 자신의 재물을 나눌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9절). 이 비유는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 재물을 사용할 줄 알라는 권고로 맺고 있다. 여기서의 ‘친구들’이란 누구를 의미하는지 막연하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루가의 전체적인 신학사상에 비추어 알 수 있다.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헤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가 12,33-34). 그러므로 우리가 재물로 사귀어야 할 ‘친구들’이란 구체적으로 우리가 은혜를 베풂으로써 나중에 우리의 중재자가 될 모든 사람들이며, 추상적으로는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베푼 모든 자선행위 및 선행을 의미한다.
이것이 루가의 입장에서 재물의 소유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당하게 번 재물이라고 해도 부당하게 사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세속의 재물’이 되고 만다. 재물은 나눔이 있을 때 사랑과 우정의 공간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던가, 아니면 이기적으로 사용되어 사회적 불안과 불평등을 야기하는 구실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저주만이 있게 된다.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루가 6,24). 오직 이 세상의 재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을 가질 때만이 참 재화를 풍성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재화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며 ‘하늘나라’의 재화이다. 참고로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12절)고 하시는데 여기서 ‘남의 것’이라고 하는 말은 재물이 혼자서 즐기는데 쓰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진다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마지막 말씀은 재물의 모든 정당성을 배제하고 있는 내용이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 재물은 사람의 모든 관심을 당겨 인간을 노예로 삼으려 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을 차지하게 되면, 재물에 대한 집착은 버릴 수 있으며,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같이 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재물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기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 재물이 ‘동참’과 ‘우정’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적 폐쇄와 원한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자신의 태도로써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재물의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 경우는 우리가 재물을 만들어 간직하거나 소유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모든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쓸 경우이다. 교부들도, 오늘의 교회도 이렇게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재화의 대부분이 인류의 1/3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쥐어져 있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대개가 어려움에 처해있다. 이 같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고자 함으로써 복음을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에도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권고하듯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아주 경건하고도 근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1디모 2,2).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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