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모차르트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모차르트를 느끼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과연 모차르트는 후대 사람들이 사는 21세기에 자신의 음악을 연호하면서 자신의 생가까지 방문할 것을 예상했을까요?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딴 모차르트 초콜릿까지 만들어서 자신을 기억하고 사랑해줄 것을 알았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그저 매일 곡을 쓰고 연주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오직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행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들이 위대한 음악가라는 호칭까지 얻게 했던 것이지요.
지금의 자리에서 충실한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굳이 먼 미래에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될 것을 예상하고 신경 쓰며 살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지금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묵묵히 행동했을 때, 세상은 이를 인정하고 기억해주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충실이 내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라면, 좀 더 깊숙이 들어가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세상은 좋은 기억을 남기지 않습니다. 나쁜 기억으로 기억되던지, 어쩌면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은 부자는 탐욕을 부렸다거나 남의 재물을 빼앗았다거나 간음을 했다거나 다른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는 종기투성이의 라자로를 매정하게 쫓아내지 않았으며,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보내서 형제들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가족에 대한 사랑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부자는 죽어서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부자라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 고통받는 라자로를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고 있는데도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산 것입니다. 사실 죽어서도 정신이 차리지 못하지요. 벌을 받고 있는데도 자기를 라자로에게로 데려다 달라고 애원하지 않고 라자로를 자기에게 보내시라고 아브라함에 부탁합니다.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이 부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부자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이 가난한 라자로의 이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가난한 라자로의 이름만을 밝힙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면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만을 채우고 있던 사람은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내 자리에서 충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충실은 욕심을 채우는 충실이 아닙니다. 그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충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충실,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나눔을 실천하는 충실입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