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먼 곳에 있는 높은 산이 아니라 신발 안에 있는 작은 모래 한 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 역시 며칠 전에 비슷한 경험을 하나 했지요.
아침 운동으로 자전거를 타는데 신발 안에 작은 모래가 들어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전거를 멈추고 신발을 털기가 귀찮아서 신발 안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모래알을 피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쉬지 않고 1시간 30분을 자전거로 달리는 것보다 또 높은 언덕을 헐떡이며 오르는 것보다도 이 모래알이 더 신경이 쓰였습니다. 결국, 자전거를 세워서 신발을 탈탈 털 수밖에 없었지요. 웬만해서 멈추지 않았던 제가 그 작은 모래알 때문에 멈춘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이나 시련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커다란 고통과 시련만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크지 않은 것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고 지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이나 시련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으니 충분히 이겨낼 것으로 생각하고서 “힘내. 잘 될 거야.”라고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 혹시 “그게 뭐가 힘들어?”라면서 상대방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아주 작은 모래알이 저를 멈춰 세웠던 것처럼,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리 큰 것만은 아닙니다. 작아 보이는 고통과 시련이 너무나 큰 아픔의 상처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셨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래서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합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셨다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리아와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바쁘게 일하고 있지만,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을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는 마음이 어쩌면 앞서 저의 ‘작은 모래알’이 아니었을까요? 주님과 함께 계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지만, 판단하는 마음이 작은 모래알로 작용해서 기쁘지도 또 행복하지도 않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집을 방문하셔도 기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있어도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잣대를 내세워서 사람들과 나를 비교한다면, 이 비교의 마음을 가지고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주님께서 우리 집을 방문하셔도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몫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