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3일 [연중 제28주일]
오늘의 제1독서와 복음은 다 같이 나병의 치유에 대한 기적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두 경우 다 주인공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치유시켜주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이방인들이다. 하나는 시리아인이고 하나는 사마리아인이다. 이 주인공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깊은 감사의 정을 표하고 있으며, 이는 생기가 넘치는 믿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1독서: 2열왕 5,14-17: 나아만의 치유와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2열왕 5,1) 나아만은 나병에 걸렸는데 히브리인 하녀로부터 이스라엘에 그 병을 고쳐줄 수 있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많은 선물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엘리사는 요르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자, 화를 내면서 그냥 돌아가려 했지만, 부하들의 말을 듣고 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고 몸이 깨끗이 나았다(14절). 이 기적은 요르단 강물이 특별히 치유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에 대한 말에 대한 ‘믿음’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의 영역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하게 한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전능과 신비를 드러내시도록 하는 것이다.
치유를 받은 나아만은 야훼께 믿음이 이미 충만해져있다. 즉 자기 나라에 가서도 ‘성역’에서 야훼를 숭배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흙’을 얼마쯤 가져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선물도 감사를 드리는 신앙의 표시일 뿐이다(15절). 그러나 예언자는 선물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의 ‘무상성’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믿음(신앙)을 통한 그분의 능력과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다. 많은 경우에 인간은 ‘신적인 것’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고 또한 자기의 이기적인 욕구에 따라 제멋대로 다루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신앙에 의지하여 하느님의 절대적 권능에 자신을 맡기게 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1요한 3,20) 우리의 지성보다 크신 분임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 대한 참된 감사는 우리의 삶과 사랑으로써 표현되는 것이다.
복음: 루가 17,11-19: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사마리아인
이러한 내용을 오늘의 복음이 전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같이 이곳에서도 다른 아홉의 유대인들과 달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인식한 한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제시하신다. 그리고 이 기적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를 지나가실 때(11절) 일어난다. 이것은 이 기적이 예수께서 수난과 영광의 자리로 가시는 데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기적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영광을, 다른 한편으로는 장차 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몰이해를 예고해주는 구원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나병치유사화(루가 5,12-18)와 비교해볼 때, 차이점은 그들을 깨끗하게 고쳐주기 전에 ‘사제들에게 보여라’(14절)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진 것으로 보아(14절)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복종했다고 하는 믿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찌 사마리아 사람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시는가? 그것은 그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같은 태도는 무엇이든지 당연한 것처럼 ‘권리’만을 내세우려 하는 오늘의 이 시대가 소중히 해야 할 인간적 태도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선물이다. 이 선물에 대한 감사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행위’는 예의바르고 양식 있는 행동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무상으로 한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진실 된 ‘믿음의 행위’이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것이다(15.18절).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18절) 하신 것은 다른 아홉 사람이 당신을 통해 자비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함을 설명해주시는 말씀이다. 아홉 사람은 그들이 유다인이라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을 당연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불충분하고 왜곡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 앞에는 모든 것이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그분의 자비는 예측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특권은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다 나병에서 ‘치유’되었지만, 사마리아 사람만이 완전한 의미에서 구원을 받았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19절). 이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은 하느님께서는 어떤 차별도 두지 않으시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의 행위를 통해서 볼 때,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보증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명칭 자체가 뜻하는 감사의 행위가 성체성사의 신비에서 최고도로 표현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감사의 행위는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이 실현되고 그분을 통해 하느님께 바쳐진다. 실제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믿음 뿐 아니라, 믿음의 표현인 감사의 행위도 그분의 사랑의 무상적 선물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계획을 넘어 우리 안에 이루어주시는 나라이다. 그 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과 관습으로 율법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하늘나라와는 먼 것이다.
선행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자신에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해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리는 태도와 겸손한 정신을 지녀야 한다. 오늘의 제2독서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에 근거하고 있는 이러한 확고하고도 무상적인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2디모 2,8.11.13). 우리의 믿음이 감사의 행위로 항상 표현되어야 함을 명심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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