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면 참으로 많이 발전했습니다. 어렸을 때 집의 텔레비전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었을 때, 새로운 세상이 온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이상입니다. 어렸을 때 모 만화잡지에서 보았던 미래의 세계에 대한 예측들이 실제로 거의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훨씬 더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으며, 동시에 안전한 시대를 살면서 번영을 누립니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훨씬 더 높은 행복도를 느끼면서 살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 큰 절망이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유하고 안전한 곳에 살수록 자살할 확률이 높다는 통계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은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분명 과거보다 더 좋은 조건, 더 나은 조건 속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희망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을 위해 통제력, 가치에 대한 믿음, 그리고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통제력은 희망을 방해하는 것을 과감하게 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가치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희망을 향해 노력할 이유를 찾게 해줍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같은 행동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집단이 있을 때 희망을 더욱더 쉽게 찾게 해줍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대한 신앙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는 통제력,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같은 신앙으로 하나를 이루는 주님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희망을 늘 마음 안에 간직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분명히 희망보다는 절망을 더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통제력 없이 살 때 희망이 있을까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순간의 만족에만 급급하다면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요? 그 누구도 없이 혼자서 과연 희망에 찬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언제나 주님 안에 머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만 주님을 찾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주님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나병 환자 10명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병이 나았다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온 사람은 몇 명이었습니까? 단 한 명만이 그것도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만 찾아와 감사를 드리지요. 나머지 아홉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우리 역시 그런 모습을 취할 때가 참 많습니다. 어려울 때는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비를 청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자신의 힘으로 해결된 것처럼 생각하는지 주님을 떠나고 맙니다.
다시 돌아와 감사를 드리며 주님과 함께했던 사람이 받은 은총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주님으로부터 자기 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은총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간 때만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울 때도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만이 참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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