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아니 일제 해방 전만 해도 노인의 위치는 탁월했습니다. 단순히 나이가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제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농업이 주축을 이루던 농경시대에 노인은 씨뿌리는 시기, 비가 오는 방식, 잡풀과 해충을 이겨내는 방법 등, 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노인의 위치는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었지요.
이제 시대가 지났습니다. 농경사회가 아닌 것도 있지만, 노인이 이제는 높은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지식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선생님도 그다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인터넷 접속만 하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찾을 수가 있으며, 그 안에서 질문을 하면 수많은 답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른을 단순히 나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할 뿐, 지혜로운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말이 바로 ‘꼰대’이지요. 권위적인 사고를 하는 어른이나 선생님을 비하하는 학생들의 은어입니다. 무슨 말만 해도 ‘꼰대질’을 한다면서 눈을 흘깁니다. 지식만을 추구하다 보니, 어른이나 선생님의 지혜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혜란 시대가 변했어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 지혜를 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또한 어른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에만 억울해할 것이 아니라 더 큰 지혜를 간직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이는 지식이 아닌 참 지혜를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를 가지고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힘있게 울려 퍼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즉, 지혜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은전의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지혜를 전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포기하지 않는 목자처럼, 은전 한 닢을 찾는 어떤 부인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중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회개하며 당신 곁으로 오는 사람을 그 누구보다도 기쁘게 맞이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보여주신 이 지혜는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많은 벽을 높이 쌓아서 이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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