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전염된다는 것은 많은 학자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1984년 오스트리아의 젊은 사업가가 지하철 앞으로 뛰어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목숨을 끊으면서 다른 사람도 자신처럼 스스로 목숨 끊기를 바랐을까요? 그저 혼자 외롭고 힘들어서 목숨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 후 1년 동안 매주 평균 5명의 비율로 동조 자살이 이어졌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자가 많은 곳을 떠올려 보십시오. 자살자가 많은 곳은 계속해서 자살자가 나옵니다. 그렇게 주변 환경 조건이 나쁜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바로 스스로 생명을 버리려는 감정이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감정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다가서야 합니다. 나 하나에서 끝나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장님 표정이 너무나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함께 있던 직원들의 표정은 어떨까요? 똑같이 좋지 않습니다. 감정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을 하면서 사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함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명한 부활 논쟁입니다. 사두가이파는 영혼의 불사불멸, 육체의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느님 심판도 없다고 주장했으며, 현세에서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바였습니다. 율법에서 명령하는 대로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면 죽어서 누구의 아내냐는 질문을 예수님께서 던지면서, 누구의 아내도 될 수 없으므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두가이파는 대부분 제관 계급이 주축을 이뤘습니다. 즉, 사두가이는 다윗 시대 대사제 차독의 후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입김이 결코 작다고 말할 수 없었지요. 그들의 말에 동조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이 사두가이들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습니다. 잘못된 이해를 통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과 같이 설명하셨고, 후에 주님께서는 몸소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지 보여주셨습니다.
내 생각과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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