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왔던 시간을 계산해보았습니다. 만 팔천 일이 넘었더군요. 그러면서 이 많은 날 중에서 기억에 남는 날은 며칠이나 될까 싶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제 삶을 바꿔 놓은 날로 규정할만한 특별한 날을 따져보니 며칠에 불과합니다.
또 한 가지, 지금 휴대전화 주소록에 있는 번호는 천 명이 훨씬 넘습니다. 이 중에서 영향을 받고 또 제가 주었던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조금 더 넓혀서 지금까지 수만 명의 사람을 만났을 텐데 그중에서 잊지 못하는 사람은 몇 명일까요? 많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많은 날을 살았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그만큼 특별한 날과 특별한 사람을 만들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 아닐까요?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사람이 없다고 또 기회가 없었다면서 한탄합니다. 원망과 함께 자신의 운이 없음을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분명 기회는 있었고, 나 자신이 기회를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줄 사람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연구소에서 이런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지금 당신은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응답자의 81%가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만큼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가 최선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의 날들을 특별한 날로, 또 나의 사람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선행과 회개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선행의 삶을 살도록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췄던 것처럼 춤추라고 피리를 불어 주었지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회개하라고 곡을 해 주었지만, 유대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요한과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받아들인 사람은 삶이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가 옳다는 것이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비판하고 부정하면서 어떠한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혜가 온전히 드러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모습은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선행과 회개의 명령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지혜가 내 안에서도 온전히 드러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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