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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15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2-15 조회수 : 287

12월 15일 [대림 제3주일] 
 
대림 제3주일에는 성탄이 그 찬란한 빛으로 우리를 감싸기 시작한다. 그래서 전례는 전체적으로 기쁨에 들떠있다. 그 기쁨은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이 이미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말아라...하느님께서 너희를 구원하러 오신다.”(이사 35,4). 이 기쁨은 피상적인 단순히 감정적인 기쁨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이다. 그 기쁨의 동기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만나러 오시고 악과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되었음’을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그 기쁨은 내가 획득한 기쁨이 아니라, 베풀어진 기쁨이며, 구원의 ‘열매’요 ‘징표’가 되는 ‘기쁨’이다. 
 
제1독서: 이사 35,1-6a.10: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적에 의해 폐허가 되어 승냥이만 살고 있는 성도 예루살렘이 옛 빛을 완전히 되찾아 재건됨을 알리고 있다. 그 도시는 유배지에서 사람들이 되돌아옴으로써 활기를 되찾는다.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피조물에게 ‘환희’와 ‘기쁨’을 준다. 유배지로부터 ‘해방된 이들’(10절)만이 아니라, 변화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이 포함되고 있다. 
 
이사야는 ‘기쁨’을 창출해내는 ‘구원’의 개념을 좀 더 형상화하기 위해 장님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을 한다고 한다.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6절). 이것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 전체가 대상이라는 것이다. 병이라는 것은 인간의 전 신체와 지체 사이에 구조적 관계적 불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불균형을 균형을 맞추어주는 것이 예수께서 하신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균형을 맞추어주는 것은 구원의 표지이며, 그를 체험한 사람들은 얼마나 큰 놀라움과 기쁨을 체험하였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복음: 마태 11,2-11: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이 예언의 말씀의 ‘기쁨’이 복음에서 다시 조명되고 있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께서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는 내용이다. 놀라운 것은 요한이 예수를 의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 요한은 예수가 아직은 종말에 오실 심판자-“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마태 3,12)-로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가 생각했던 메시아 역시 강력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우리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또 나타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그 모습이 우리가 생각할 때에 나약하고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더더욱 강하게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음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5-6절). 
 
예수의 이 말씀들은 이사야서에서 몇몇 대목들(26,19; 29,18; 61,1)과 관련이 있으며, 그 중 한 대목이 1독서에 나타난다(이사 35,5-6). 여기서 볼 때, 예수께서는 ‘심판자’로서보다도 ‘구원자’ ‘해방자’로서의 메시아이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인간들의 불의 외에도 재앙이나 불행을 온통 뒤집어쓰고 있는 듯 한, 보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 즉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가난한 이 그리고 죽은 이들까지 가까이 하신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권능의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특히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일치, 구원과 동참의 행위이다. 이러한 ‘표징’들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이심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더 이상 ‘의심할’ 여지를 가지지 않게 된다.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께서는 요한에 대한 찬사를 하신다(7-11절). 세례자 요한이 위대하다는 것은 강인한 정신력과 참회의 정신에 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고 나약한 사람도 아니다. 또한 그가 위대하다는 것은 그가 구약에서 출애굽기(23,20)와 말라기 예언서(3,1)에 나타나는 메시아의 ‘선구자’라는 사실에 있다. 전자에서는 야훼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게 하시는 내용이 있고, 후자에서는 야훼께서 사람들이 당신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킬 사자를 당신이 오시기 전에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러한 고귀한 사명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될 ‘하늘나라’의 일원은 아니더라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11절)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고 하신다(11절). 그러나 그렇다고 요한의 기쁨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명은 신랑의 오심을 알리는 것이었고 이것이 그가 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2독서: 야고 5,7-10: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요한의 기쁨은 불확실성과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끝내 기다림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가끔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결과도 내지 않거나 무산되기도 하고, 그 ‘표징’의 의미가 약화되기도 하고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 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인내로운 기다림이어야 한다.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야고보 사도는 2독서에서 농부의 개념을 들어 그리스도인의 ‘인내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운명적 체념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끈기 있게 협력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참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가까이 접근시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음에서 큰 기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구원이라는 것은, 또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의 것이다. 신앙한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힘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기쁨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기쁨에 대해 오늘 독서가 말하고 있는데 그 기쁨은 그냥 아무런 수고 없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구한 인내를 가지고 자신을 이기는 삶에서,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자세가 기쁨을 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기쁨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항상 갖춰 입어야 할 옷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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