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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2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2-22 조회수 : 327

12월 22일 [대림 제4주일] 
 
오늘 전례는 온통 경이와 ‘놀라움’의 징조로 되어있다.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역사 내에 개입하시고, 우리에게 ‘오실’ 때에는 항상 ‘흔적’을 남기신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놀라운 일’ 또는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질서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제1독서: 이사 7,10-14: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사야 예언자는 왕에게 하느님만을 믿으라고 권하였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서지 못하리라”(이사 7,9)고 하면서 아하즈를 야훼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 그에게 어떤 ‘징조’를 청하라고 한다(11절). 그러나 아하즈는 자신의 정치적인 계산 때문에‘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 6,16)는 종교적 이유를 위선적 구실로 내세워 ‘징조’를 요구하기를 거절한다. 그러나 그러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야훼께서는 여전히 ‘징조’를 보여주신다. 그 징조는 그 왕이 신앙이 없음으로 해서 야기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일어나야 할 징조이다. “다윗 왕실은 들어라.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도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도 성가시게 하려는가?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3-14절). 
 
그러나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께서는 다윗 가문을 이어주신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이다. 하느님은 인간들에 대한 사랑과 충실성을 저버리심이 없이 인간의 계산과 계획을 뒤집어 놓으시고, 오직 인간들이 당신의 ‘길’을 따라 걷고 당신의 약속과 지혜를 더 믿으라고 하신다. 
 
복음: 마태 1,18-2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 
 
여기서 말하고 있는 ‘동정녀’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오늘 복음에(1,22-23) 따르면 남자를 모른 채 동정녀의 몸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시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라는 사실이다. 사실 마리아는 이사야서의 그 구절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마리아의 모성은 참으로 위대한 ‘징표’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은 ‘처녀’이며, 그 아들은 그녀가 이름지어줄 만큼 그녀에게 속해있고, ‘임마누엘’이라는 그의 이름은 장차 메시아로서 그의 사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역사상 어떤 인물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되실 수 있도록 그 도구 역할을 실현시킨 사람은 없다. 
 
또한 메시아는 순수한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하느님의 약속을 ‘살과 피’로써 실현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역설적이고도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우리 가운데 오실 것이다. 이것이 메시아의 동정잉태와 탄생의 의미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의 복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징조’의 신비스러운 면이 드러난다. 한 동정녀가 있었는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고 어머니가 되었다. 그 아들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들과 인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거기에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그는 메시아에게 혈통으로 다윗 가문을 이어준 것이 아니라, 법적 동의와 사심 없는 사랑과 봉사로써 그 가문을 이어주었다. 오늘 복음은 믿음의 요소로 가득 차 있다.그 첫째 요소는 이미 말한 대로 예수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예수께는 인간적 차원에서 말하는 아버지가 없고, 동정녀이신 어머니 자신도 오직 성령에 의해서 그를 잉태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인간적 규범에 따른다면 마리아도 온전히 그의 어머니가 되지는 못한다.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예견되고 기대하던 존재이지만 완전히 ‘규범’을 벗어나 그것을 초월해 있는 분이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시지만, 우리 인간들을 섬기러 오신다. 이것이 마태오가 제시하는 둘째 신앙의 요소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21절). 예수라는 명칭은 히브리말로 여호수아(Jehoshu'a)즉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라는 말의 번역임을 알고 있다.그리고 구원하실 백성은 하느님의 용서를 끊임없이 체험하고 있는(9,8; 18,15-18) 교회를 의미한다. 또 하나의 명칭은 ‘임마누엘’이라는 명칭인데,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23절)고 번역하고 있다. 이 명칭은 예수보다 더 명확하게 메시아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 되신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자신이 하느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시므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시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지만, 인간의 주도권을 말살시키지 않고 그것을 들어 높이신다. 이것이 마태오가 제시하는 셋째 신앙의 요소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러기에 마리아의 협조를 구하셨다. 그러나 결코 쉽거나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잉태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요셉(19-20절)의 눈에까지도 부정한 여인,거짓된 여인으로 비쳤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도 극적인 협조를 요청하셨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가운데 오신다는 것은 어쩌면 이처럼 크나큰 신앙과 혹은 그보다 더 큰 고통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오심’과 눈앞에 다가와 있는 성탄은 그분의 사랑을 믿는 이들 모두의 용기 있고 폭넓은 협조 없이는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들이 진정 ‘임마누엘’을 실현시키고 그분을 체험하는 장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협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즉시 응답을 드릴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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