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떤 형제님께서 성지 사무실에 화난 얼굴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고서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 그렇게 살지 마. 내가 다 보고 있다.”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을까요? 정말로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또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막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사실 제게 이런 말을 했던 형제님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큰 충격을 받아서 정신적으로 약간 아프신 분입니다. 따라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지금 아파서 했던 말일 것입니다. 이를 알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상대방과 잘 아는 사이라 해도 자신에게 부정적인 말을 한다면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충분히 그 말을 한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좋게 생각되지도 않고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도 못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기분이 나쁘지만, 스스로를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잘 살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과 함께, 이 형제님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아니겠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다 보고 계십니다. 따라서 조금 더 신경 써서 살아야 합니다. ‘이만하면 되었어.’가 아니라 ‘아직도 멀었어.’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 장면입니다. 할례식 때에는 그의 이름을 결정하는 명명식도 함께 이루어지는데, 이웃과 친척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즈카르야’라고 부를 것이라고 예상했지요. 그러나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름을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물었지만, 그 역시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했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의 이 모습에 우리는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늘 부족합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도 늘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견해와 세속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때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에서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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