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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12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1-12 조회수 : 284

1월 12일 [주님 세례 축일] 
 
주의 세례축일은 전례개혁을 통해 빛을 보게 되었다.그것은 네 복음에 모두 일치하여 강조하는 것과 예수님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 사이의 관계에 있다. 이 때문에 동방전례에서는 오늘 성세수가 축성되고 예비자들이 세례를 받는다. 주의 세례축일은 예수님의 세례의 사명을 알아들으면서 또한 우리가 받은 세례의 사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준다. 
 
복음: 마태 3,13-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다 
 
복음에서 요한은 자신에게서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 예수님 앞에서의 태도는 요한 자신의 놀라움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렇게 당신을 낮추셨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초기교회 신자들의 놀라움이기도 하다. 사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표지였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스스로를 낮추시어 ‘죄가 없으신’(요한 8,46) 당신과 ‘죄 많은’ 인간들과 일치를 이루고자 하심이었다. 또한 세례를 받으시는 행위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1베드2,24) 당신 자신의 몸을 바쳐 인간의 죄를 모두 없애기 위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행위와 같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29)라고 세례자 요한은 위엄 있게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없애시는 임무를 지금 그리고 당신의 생애 모든 순간에 수행하여 성취하신다. 그러기에 세례 드리기를 사양하는 세례자 요한에게,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15절). 이것은 하느님의‘뜻’에 대한 신선하고도 철저한 충실성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러 오셨고 그분 자신이 맨 먼저 그 뜻을 생활화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못하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렇게 예수께서는 아버지의‘뜻’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고, 따르셨기 때문에 그분의 순명이 첫 아담의 불순명의 죄로 파괴된(로마 5,19 참조)태초의 질서를 회복시키신다. 
 
이렇게 당신을 겸손되이 낮추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으시며 아버지께로부터 ‘사랑하는 아들’(17절)로 선포하시어 메시아로 들어 높이신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16절)라는 것은 상징적인 것이며 암시적인 말이다.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이 다시 제 자리를 찾게 되고, 메시아이신 그분을 통하여 인간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그분을 활동케 하시는 성령께서 예수 안에 현존해 계시다는 사실과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인식하고 계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의 사명은 당시의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 사상과는 아주 다르다. 그것은 겸손과 고통으로 점철된 메시아 사상이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러한 메시아니즘을 울리고 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7절). 이 말씀은 죄로부터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메시아가 짊어지게 되는 고통과 능욕과 수치의 사명을 점진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그 유명한 야훼의 종의 노래의 첫째 노래에서 취해진 것이다. 분명 메시아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던 그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멸시를 당한 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제1독서: 이사 42, 1-4.6-7: 여기 내 마음에 드는 나의 종이 있다 
 
1독서는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를 거의 전체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오늘 복음이 글자 그대로 취하고 있다. 다만, ‘종’이 ‘아들’로 바뀌었는데 70인 역에는 páis가 종도 뜻할 수 있고 아들도 뜻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이나 다른 복음에서도 모두 ‘아들’이라고 하면서 예수와 성부 사이에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이사야서는 메시아가 특별히 성령을 받아 그 성령의 힘으로 인간들 사이에 정의와 평화와 해방을 심어야하는 사명을 이룰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그것은 예수께서 겸손하게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며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폭력이나 지배의 논리로 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함과 순종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의 화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생명력과 바르게 살고자 하는 원의가 빛을 잃고 가물거린다 해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이 때문에 저지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3절). 
 
제2독서: 사도 10,34-38: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모두에게 성령의 선물을 베풀어주신다. 오늘 2독서의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을 통해 축성되신 것이 바로 그분의 구원의 사명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표지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악마를 이기시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실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명 그리고 형제들을 받들어 섬김으로써 이었다. 그분의 이러한 행동은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 선포되어 빛과 사랑의 불로 성령을 증거하도록 세상에 파견되고 있는 우리의 세례를 통해 전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주의 세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이 있다. 예수님의 세례는 십자가와 부활을 향한 것이다. 그 십자가와 부활로 세상을 구원하신다. 우리의 세례도 마찬가지다. 즉 우리의 세례의 마지막 도착점은 우리가 다른 형제들을 위한 생명의 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무한한 빛 앞에서 빛이 되어 그 빛의 초자연적 광채가 넘쳐흐르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세례가 세상의 구원을 위해 바쳐져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활동하실 때, ‘인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힘에 의존하신다. 예수님의 신적‘자녀관계’는 세례 그 순간에 그랬듯이 권세를 통해서 보다는 나약함을 통해서였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같이 나약함과 겸손을 본받을 수 있을 때, 우리 역시 세상의 구원을 위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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