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남으로부터 사랑받으려는 사람과 자기가 먼저 사랑하면서 동시에 남으로부터도 사랑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의 삶이 힘들까요? 둘 다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바라는 사랑을 온전히 채워줄 사람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동반하는 것이 미움입니다. 미움의 감정을 품으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베푸는 마음만 가지고 있는 사람, 상대방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만 있기 때문입니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산이 이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산이 좋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산을 오르며 커다란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지,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냥 사랑 자체에만 집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죄인이 회개하여 새 삶을 얻는 것을 기뻐하라는 의미로 되찾은 아들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작은아들은 아들 자격을 잃어 마땅했습니다. 아버지 집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방종한 생활을 했습니다. 더군다나 재산을 탕진하여 어렵고 힘들 때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달라고 말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아버지 앞에서는 이 말을 쏙 빼놓는 것을 보면 기회주의자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기쁘게 받아들여서 살진 송아지를 잡는 거룩한 잔치까지 벌입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성공만을 기뻐하는 분이 아니라,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당신 집으로 돌아오는 것 자체를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랑 자체만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면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죄인들을 향해서도 사랑의 마음으로 봐야 하는 것을 그래서 죄인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버지 뜻에 함께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역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처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구별하려고 합니다. 이런 구별이 나를 절대로 행복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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