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주보

수원주보

Home

게시판 > 보기

오늘의 묵상

3월 17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3-17 조회수 : 306

제가 키우는 개는 3마리입니다. 꼬박꼬박 밥을 챙겨주고 같이 놀아주기도 합니다. 또 어디가 아픈 것 같으면 차에 태워 병원까지 다녀옵니다. 성지에 온 지 벌써 5년째이니 5년째 이렇게 챙겨주고 보살펴 주었습니다. 분명히 개들에게 많은 것을 주고 있으며 잘 보살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아플 때, 어려움 속에 있을 때, 개들이 은혜를 갚겠다고 어떤 특별한 행동을 할까요? 5년 동안 제게 밥을 직접 해준 적도 없고, 우울해한다고 제 앞에서 재롱잔치를 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도 모르는 개라면서 개들을 향해서 화를 낸다면 어떨까요? 아마 사람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기대할 것을 기대하세요.”

개를 향한 보살핌과 정성을 보답받으려는 기대를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히 함께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이 당연한 생각을 왜 사람에게도 적용해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내게 응답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 “어떻게 저럴 수 있어?”라면서 분노합니다. 그러나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이런 생각만 할 수 있다면 내게 다가오는 상처를 조금이라도 줄여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은 말씀하시지요.

‘사람에게 기대하지 말고 하느님께 기대하라. 사람에게 청하지 말고 하느님께 청하라.’

사람에게 기대고 사람에게 청하기 때문에,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용서하지 못할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일흔일곱이라는 수는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상징합니다. 특히 십자가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라는 충만한 선물을 받지 못한 세대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용서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께 특별한 선물을 드렸습니까? 하느님에게 도움이 되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고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매정한 종의 비유 말씀을 해주시지요. 주인이 큰 빚을 탕감해주었으므로, 당연히 그 종도 자기 동료에게 자비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은 자비 받은 것은 잊어버리고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자신이 받은 자비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남이 내게 한 피해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라고 단정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받은 자비를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자비를 계속해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