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시험이 끝났다며 신난다는 고등학생들을 데리고 노래방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신부님이 먼저 한 곡 해주세요.”라고 부탁했고, 저는 아이들의 나이 때에 많이 불렀던 노래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이 영 시원찮습니다. 아마도 옛날 고리타분한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노래가 끝나고 이제 아이들의 차례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자리에 더는 있기가 힘들었습니다. 아이들의 노래가 너무 시끄럽고 이해도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재미있게 놀라고 말하고서는 성당으로 돌아왔습니다.
겨우 2~30년의 차이인데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세대 차이가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근본적인 차이는 자신의 십 대 때 들었던 노래의 차이일 뿐이라고 하더군요.
경제학자 세스 스티븐슨에 따르면 십 대 때 듣는 노래가 일생의 음악 취향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뇌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도파민, 세로토닌 등을 내뿜으면서 쾌락을 느낍니다. 그런데 가장 많은 호르몬을 배출하는 12세에서 22세 사이의 경험을 이후에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뭐라 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십 대에 어떤 노래를 들었는가의 차이일 뿐입니다.
각 사람의 판단도 어쩌면 별것 아닐 뿐인데, 그 판단이 정답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런 판단 가운데 사랑은 희미해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왕실 관리가 찾아옵니다. 그는 헤로데 조정의 관리이거나 유대아에 파견된 로마 황제의 신하일 것입니다. 즉,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데 하물며 이방인이 어떻게 믿겠습니까? 실제로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야만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나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난 뒤 믿음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을 믿고서 다시 집으로 떠나갑니다.
주님의 말씀을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고 믿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표징이나 이적 없이는 주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세상의 기준으로 주님을 판단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만으로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선명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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