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때 어느 수도원에서는 기도 중간에 수사 한 명씩 나와서 영적 나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한 수사님은 이 시간이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말재주가 없었고, 특히 남들 앞에 서면 떨려서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원장 수사님을 찾아가서 다른 수사님께 방해가 될 뿐이니 자신은 빼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하지만 원장 수사님은 이럴수록 더 많이 해야 한다며 오히려 세 번 연속으로 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첫 번째 나눔 때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아십니까?”라고 말합니다. 모든 수사는 고개를 흔들며 모른다고 표시했지요. 그러자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분명히 아십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열심히 사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 날, 전날과 같이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수사들은 전날과 달리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여러분이 모두 아는데 제가 무슨 말을 더 드리겠습니까? 그저 아는 대로 실천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나눔 때,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아십니까?”라고 또 묻습니다. 이에 절반은 고개를 안다고 끄덕이고 나머지는 고개를 모른다고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반반씩이니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모르는 것도, 아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께 맡기면서 열심히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주면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맡기면서 열심히 살지 못하는 우리이고, 잘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아는 척하며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과거 예수님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나자렛에서 살았다는 것은 알지만 베들레헴에 대해서나 그분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아버지에 대해서도 참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만 정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라는 확신을 두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잘못 아는 것은 커다란 문제가 됩니다. 잘못 알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음으로 몰았던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 맡기면서 열심히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이 마치 하느님의 뜻인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늘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사람만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