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처음 들어가서 어느 선배님 방에 놀러 갔다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글쎄 이상한 책들이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토대가 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비롯해서 조잡해 보이는 복사판 책들이 꽂혀 있는 것입니다. 80년대 뉴스에 종종 나왔던 간첩이라는 증거로 제시된 불온서적이 이 선배의 방에 있었습니다.
‘혹시 간첩이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혼란에 빠졌습니다. 물론 이 사회를 전복하기 위해 이런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학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구해서 복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막 신학교에 들어온 저로서는, 또 이제까지 강력한 반공교육을 받아왔던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때 불온서적으로 취급받던 책들이 모두 풀려서 깔끔한 디자인으로 다시 인쇄되어 판매되고 있습니다.
생각의 자유를 침해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나와 다른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가 아닌 함께 하지 못할 사람을 가리는 사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사람들과 함께하십니다. 그들 역시 하느님의 자녀로 함께 해야 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 사람까지도 구원으로 이끄시는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들의 믿음 없음을 보시고 떠나시겠다는 엄포였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닫혀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이제 포기할 만도 합니다. 그냥 죄 속에서 죽으라면서 내버려 두시면 더 편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더불어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 줄 십자가에 관해 다시 말씀해 주십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구원으로 이끌려고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사람들과 얼마나 함께하고 있는지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편협된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 구원의 길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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