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1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사도행전 4,32-37
요한 3,7ㄱ.8-15
어떻게서든 위로부터 다시 태어납시다!
초막절에 열린 유다 최고의회에서 용감하게 예수님을 변호하였으며,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까지 치렀던 니코데모와의 대화는 계속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
(요한 복음 3장 7~8절)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유일한 비결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땅에 하강(下降)하시고, 상승(上昇)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그 신앙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행위인 세례입니다.
결국 우리는 세례로 거듭 나야만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수 있고, 그 결과 하느님을 뵐수 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로서 율법이나 지적인 측면에 있어 최고봉에 서있던 니코데모였지만,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 여전히 알쏭달쏭합니다.
그래서 또 다시 의문 부호를 찍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요한 복음 3장 9절)
다시 태어난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재생을 말씀하시는데, 니코데모는 육체적 재생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 재생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짧막하게나마 성령의 존재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성령은 마치 바람같다고 설명하십니다.
바람이 동서남북 어디로든 자유자재로 부는 것처럼 하느님의 영, 성령께서도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하느님의 성령도 바람같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네 인생도 마치 바람같습니다.
나름 버틴다고 두 다리에 힘을 딱 주고 지상에 서있지만, 성령의 세찬 바람이 언제, 어디에서
확 불어올지 모릅니다.
그 바람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더 머물러 있고 싶어 아무리 발버둥쳐도 성령께서 ‘자 때가 되었다! 일어나자!’
그 한 마디면 그걸로 끝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과 축복은 놀랍습니다.
물과 성령의 세례로 다시 태어난 우리 영혼과 육신은 마치도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워질 것입니다.
평소 잘 들리지 않았던 부드러운 주님 음성을 더 명확하게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벼워진 몸을 성령의 바람에 내맡겨 어디로든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서든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지긋지긋하던 십자가가 사실은 가장 큰 하느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지루하고 고달프게 만들었던 일상생활이
눈부신 경이로움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성가시게 했던 이웃들이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말끔하게 정화되어 순수해진 영혼의 눈으로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 안에 들어있는 값진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나게 될 때 주변 모든 사물들이 다 스승으로 변할 것입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꽃잎들, 푸른빛을 더해가는 대나무 숲, 출렁이는 물결,
고요한 호수, 황금빛 석양...이 모두는 다 인생의 진리를 말해주는 스승이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 예수님은 더 이상 멀고먼 옛 사람, 이천년 전의 나자렛 사람이 아니라, 오늘 내 일상생활 전체를 동반하시는
‘나의 주님, 나의 스승님’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