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미술 학원에서 모델을 앞에 두고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서 학생들이 그린 그림을 확인하면 다 똑같을까요? 한 명의 모델을 똑같이 보고서 그렸으니, 똑같은 그림이 학생들의 숫자만큼 나왔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같은 모델이지만 학생들이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누구는 전신을, 다른 누구는 모델의 부분을 그리는 등 제각각의 그림이 나왔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도 모두 다릅니다. 어느 사람이 길에서 울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누구는 힘들어서 울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같이 울면서 함께 합니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면서 쳐다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길에서 울고 있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과 감정에 따라 모두 다른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 역시 모두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주님께 대한 내 생각이 정답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단지 한 부분만을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같은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더라도, 보는 모습이 다르고 느끼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닙니까?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 인간의 몸으로는 그분 모두를 완전하게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반대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아픈 사람을 치유해주시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또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면서, 하느님과 함께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빵의 기적을 본 뒤인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의 닫혀 있는 생각의 틀에 주님을 가두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확신을 하니 주님께서 보여 주신 모든 표징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보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과 똑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대한 믿음이 모자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까요? 만약 나와 다르다며 이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 역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런 습관이 주님께도 그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 배고프지 않으며, 절대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내 생각의 틀에 주님을 가둬서는 안 됩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