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곶성지 초창기에 난방을 고민하다가 어렸을 때의 꿈을 떠올리며 화덕 난로를 설치했습니다.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장작을 때는 벽난로가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벽난로는 설치비가 만만치가 않아서 근처 철공소에서 제작한 화덕 난로를 사서 설치했습니다. 무엇보다 성지 뒤에 산이 있어서 나무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나중에 그 산이 우리 산이 아니기에 함부로 나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 무식했던 저였습니다).
설치 후에 할 일이 생겼습니다. 난로에 넣을 수 있는 크기로 나무를 잘라야 했습니다. 창고를 보니 손도끼가 있어서, 열심히 이 손도끼로 장작을 팼습니다.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애쓰는 모습을 본 순례를 오신 형제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무겁고 큰 도끼를 써야 편합니다.”
내 손에 딱 맞는 손도끼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데, 크고 무거운 도끼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님은 “장작은 도끼가 패는 것이지, 사람이 패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그저 거들 뿐이지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철물점에서 큰 도끼를 사온 뒤에 이 말씀의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장작은 도끼가 패는 것인데, 제가 패는 것이라는 생각에 그 고생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나는 그저 거들 뿐인데,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쓰지 않아도 될 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옆에서 그분을 거들 뿐입니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교만의 길에서 벗어나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 겸손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일까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을 중심으로 기도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는 것’은 우리의 복된 삶과 구원에 관계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주님께 모든 주도권을 맡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기도를 바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들어주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신다는 주님의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함을 드러내는 것을 암시합니다. 청하는 이들의 기도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사람이시기에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다고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시므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 주도권을 맡기는 기도를 바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역할은 주님을 거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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