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다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회’요 ‘장소’이다. 특히 하느님께서 전교사명을 통해 특별히 존재하는 사람들 즉 ‘예언자’나 ‘옳은 사람’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제1독서: 2열왕 4,8-11.14-16a: 엘리사와 수넴의 여인
수넴의 여인은 그 지방을 지나다녔던 예언자 엘리사를 극진히 환대하고 남편에게도 그것을 설득한다(9-10절).하느님께서는 이 여인의 열성을 엘리사를 통해 갚아주신다. 즉 그 여인은 아들이 없었고 남편도 나이가 많아 아기를 낳을 수가 없는 나이였는데도 아들을 갖게 되리라고 예언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14-17절). 나그네를 대접한다는 것은 생명의 가치를 지닌 행위이다. 그것은 ‘생존여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나그네 대접을 받지 못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의 행위이며,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나그네 대접’에 대한 보상으로 주시고 계시다.
제1독서의 ‘나그네 대접’에는 인간적 차원 외에 ‘거룩한’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 수넴의 여인은 그 점을 확언하고 있다. “틀림없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9절). 이제 ‘신앙’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나그네 대접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말씀의 선포자가 되게 해줄 것이다.
복음: 마태 10,37-42: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박해를 야기할 뿐 아니라, 복음선포 사명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결단력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이해시켜주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37-39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면 끊어버려야 할 인간관계의 범위를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그리스도만이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신앙 안에서 심리학적 측면이나 광신적 행위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영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38절). 또한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단순한 가정이 아닌 분명한 현실로서의 십자가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느님과 진리에 충실하신 그분 존재의 본질적 차원이었다. 즉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형제들을 위해 행동하셨던, 그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역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분의 길을 철저히 따라야하기 때문이며, 생존을 위한 타협이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의 힘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예수께서는 당시 전통적으로 인식되고 있던 합법적인 ‘대리권’의 원리에 따라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당신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물론 파견 받은 자와 파견하신 분은 다르다. 선교사명에 있어서도 주관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명 자체에는 ‘연속성’이 있다. 이 ‘대리권’외에 다른 원리는 사도들을 ‘맞아들임으로써’ 복음선포를 돕는 사람은 복음선포 그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41-42절).
여기서 ‘맞아들이다’는 말은 물질적 차원에서의 ‘맞아들이기’ 즉 수넴의 여인이 예언자 엘리사에게 했던 것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한 ‘나그네 대접’의 의미이기도 하다. 즉 물질적 의미 외에 ‘신앙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하느님의 도구로 봉사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 ‘예언자’는 예언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옳은 사람’은 옳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기에 사도로 사명을 받지 못했지만 사도들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사도적’인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 ‘옳은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들’(41-42절)은 모두 복음 선포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연계된다.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요구되는 ‘성성’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복음선포 사명이다. 자신은 죽음을 당한다 해도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셔야 한다.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철저한 자기 포기이다.
제2독서: 로마 6,3-4.8-11: 세례를 받고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점에 대해서 세례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세례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과‘묻힘’에 참여케 함으로써 ‘부활’에 참여케 해준다. 십자가는 십자가로만 남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3-4.11절).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11절).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죽음’과 ‘생명’의 상징적 의미를 윤리적 행위의 개념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신자의 죽음과 생명 두 순간이 동시적(同時的)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말한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는 죽음과 생명이 끝없는 투쟁을 벌일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매일의 십자가를 안겨준다.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23).
우리는 모두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복음 선포자들에게 협조함으로써, 그들이 더욱 복음을 선포하는데 잘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같은 상을 받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선포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하나하나 없애면서 절대가치이신 그리스도를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될 때, 우리의 삶도, 이 사회도 아름답게 변화되어 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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