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전염병처럼 퍼지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혐오’입니다. 누군가를 또 어떤 집단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말합니다. 물론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이 감정이 폭력적인 행동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면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성지에서 어떤 아이가 친구와 대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극혐’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강도가 더 심할 때, ‘극혐’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하더군요. 아마 ‘혐오’라는 말로도 부족했나 봅니다.
어린아이도 쓸 정도로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에 대한 타협과 조율 없이 무조건 싫다면서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도 별것 없습니다. 그냥 자기감정 표현으로 ‘극혐’이라고 말 한마디 하고는, 혐오하는 것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혐오의 생각이 ‘묻지마’ 공격으로 나아갑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그리고 다른 집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면 어떨까요? 이 세상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살아감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하느님을 멀리하면서 함께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아마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향해서도 ‘극혐’이라고 외치지 않을까요?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제자들에게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그런 것들을 이겨 낼 수 있는 더 큰 은총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이 어디서 기도하든지, 심지어 자신들이 하느님께 봉사하고 있다고 믿는 세속 권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의 순간에서도 주님께서는 지켜 주신다고 하시지요.
분명히 박해의 고통은 죽음까지도 나아갈 수 있는 커다란 크기입니다. 그런 박해의 고통을 주셨다고 하느님을 혐오하면 과연 하느님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안에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 시대처럼 피의 순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많은 유혹이 바로 우리의 박해자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혐오하고 반대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선물이 멀리에 있지 않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