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9일 [연중 제16주일]
복음: 마태13,24-43 : 하느님 나라의 비유: 밀과 가라지, 겨자씨, 누룩
오늘 복음에는 가라지와 겨자씨 그리고 누룩의 비유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가라지의 비유만 보기로 하자.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그런데 원수가 악한 뜻으로 거기에 가라지를 뿌린다. 그런데 가라지는 꽃이 필 때에야 그 모습이 드러난다. 그것을 보고 종들이 주인에게 알리며,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28절)라고 한다. 그러나 주인은 추수 때까지 버려두었다가 가라지와 밀을 가리도록 하고 있다(29-30절).
그것은 가라지가 다 자라 누렇게 되기 전에는 밀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위험부담을 덜기 위해 추수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더 낫다. 추수 때, 가라지는 단으로 묶어 불에 태우거나 가축의 먹이로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악을 윤리적인 사실로 가르치신다. 즉 악은 바로 잡을 수 있고 회복될 수 있고 극복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선으로 바꾸어질 수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메시아이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메시아 시대는 요한복음이 말하듯이 ‘심판’의 시대가 아니라 구원의 시대이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그러기에 확실히 모든 사람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부여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가라지가 밀과 같이 함께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악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표지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낙관주의’로 가득 차 있다. 우선 악은 죄의 의미보다 그것이 극복되기 위해 하느님의 현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세주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존재임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 악은 실제로 마지막 ‘추수 때’(30절) 극복될 것이다(41-42절 참조).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그 승리를 즉시 보고 싶은 마음에 그 가라지에 대해 참지 못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자세는 열심한 자세라기보다는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태도이다. 그것을 뽑아버리면, 잘라버리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선과 악은 마음이라는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잠시 졸고 있는 사이에 사탄이 우리 마음속에 억센 가라지를 뿌릴 수 있다. 이 가라지를 제거하는 노력과 수고는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을 의미하는(교회 5 참조) 교회도 가라지에 의해 침해되어 황폐화 할 수 있다.
이제 오늘 복음은 비유의 후반부에서 선과 악의 현실적인 공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으로 강조점이 옮겨지고 있다(38-42절). 그리고 마지막 구절인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43절)도 ‘종말론적 관점’을 말한다.
이렇게 강조점이 심판에 두게 된 것은 공동체가 처음에 가졌던 열심을 다 잊어버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도 선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구원의 기준이 되지는 못하며, 반드시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선과 악이 공평하게 드러나게 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제 사랑의 법에 불충실하면 모두가 단죄를 받을 것이며, 사랑의 법에 충실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입게 될 것이다. 하느님 앞에는 어떤 특권도 없다. 신앙에는 특권이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모두 심판이 닥치기 전에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비유이다.
우리의 신앙 안에서 볼 때, 가라지는 회개하여 언제든지 좋은 결실을 맺는 좋은 밀이 될 수 있는 존재들임을 생각하며, 나 자신을 위해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 주도록 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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