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신부와 대화를 나누다가 제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의 상황이 생각나기는 했지만, 그렇게 상처 주는 말을 진짜로 했을까 싶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평소에 잘 하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 제가 입고 있었던 옷과 그때의 장소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신부의 말을 들으면서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기억이란 만들어진 기억이 많다고 합니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모르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억을 만들고, 그 기억에 오류를 지적하면 상대를 거짓말쟁이, 위선자로 몰면서 관계를 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그럴 리가 없다는 처음의 생각을 바꿔서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저 자신도 제가 원하는 기억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정말로 미안하다고 그때는 너무 어렸고 판단력이 부족했다며 사죄했습니다.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는 30년 전의 기억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지금의 관계를 잘 맺는 것이 아닐까요?
어느 책에서 본 구절이 생각납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십니다. 길에 뿌려진 씨, 돌밭에 뿌려진 씨,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 그리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를 설명해주십니다. 씨가 뿌려진 곳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하느님 말씀이라는 씨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사라질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한 곳에서 과연 가능할까요? 세상의 물질적인 욕심으로만 채워졌다면 어떨까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남의 잘못만을 바라보면서 단죄하는 데 힘을 쏟는 곳은 어떨까요? 이러한 마음이 좋은 땅이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냥 씨가 죽어 없어질 것이라면서 씨를 뿌리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분명히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면서 씨를 뿌렸을 것입니다.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이 주님의 기대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었을까요? 말도 안 되는 기대라면서 콧방귀만 뀌겠습니까? 아닙니다. 충분히 가능하므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열매를 분명히 맺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