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부님이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미사 때 강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앉아계신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렇게 좋으면 자기부터 가지?”
혼잣말이라고 했겠지만,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듣고 키득키득 웃습니다. 신부님도 이 말을 들어서 기분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온 힘을 다해 강론했습니다. 강론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맨 앞에 앉아계신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말로만 말고, 하느님 나라가 왜 좋은지 증명해 보세요.”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할머니! 올해 돌아가신 친구분인 마리아 할머니, 또 데레사 할머니 기억나시죠? 그 나라가 얼마나 좋으면 안 돌아오고 계시겠어요?”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 기준으로 보면 절대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하나를 이루며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간 사람은 그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를 압니다. 그래서 많은 성인 성녀의 바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바람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제자들은 완전히 눈이 뜨이지 않아서 인간들끼리 이야기하듯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외딴곳에서 세상을 배불리 먹일 준비를 하십니다. 제자들은 시간이 이미 늦었다고 하지만 주님은 시간에 매인 분이 아니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을 유심히 보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늘 눈을 하느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누어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 모습을 우리가 묵상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가 이렇게 전해줍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이사 55,3) 바로 주님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우리가 사는 방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로마 8,39 참조).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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