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예레미야 28,1-17
마태오 14,22-36
우리가 주님만 바라볼 때 강건해집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교회의 반석, 초대 교황, 위대한 사도, 천국의 관리자...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더욱 존경스럽고, 더욱 정감이 가고,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또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인생사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흑역사들로 즐비했다는 것입니다.
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향한 오랜 신앙여정에서 수시로 흔들렸고, 나약했고,
갈등했고, 번민했다는 것입니다.
그 같은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마태오 복음 14장 22~33절에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른바‘수제자 갈릴래아 호수 퐁당 사건’입니다.
사도단 일행이 갈릴래아 호수를 가로질러 가려다가 역풍을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맞바람이 얼마나 강했던지, 파도가 얼마나 거세던지,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도 배는 항상 그 자리였습니다.
기진맥진 탈진해져 제정신이 아닌 제자들 앞으로 예수님께서 유유히 물위를 걸어오셨습니다.
그 모습에 혼비백산한 제자들은 스승이요 주님, 구원자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향해 ‘유령’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스승님을 보고 사색이 되어 유령이라고 외쳤던 사도들, 그러나 막상 확인해보니 스승님이셨습니다.
무척이나 ‘뻘쭘’한 상황이요 어색한 순간, 가만히 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분위기 파악 못하고 베드로 사도가 또 나섰습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그가 용기백배해서 물위를 몇 걸음 걸어 예수님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아싸! 이제 나도 된다. 나도 스승님처럼 물위를 걸을 수 있다!.”
그 순간 그는 다른 제자들 앞에 우쭐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좀 뻐겼을 것입니다.
“자네들 나 봤냐? 나야 나! 나라구! 수제자! 너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될 거야.”
그러나 팽배했던 베드로 사도의 자만심도 촌각이었습니다.
유머감각이 보통이 아니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 잔뜩 기고만장 해있는 그에게 한방 제대로 먹이십니다.
순식간에 거센 바람을 일으켜 베드로 사도 앞으로 보내십니다.
갑자기 겁을 잔뜩 집어먹은 그는 여지없이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의 그 자신감, 당당함을 순식간에 사라지고 큰 두려움에 체면불구하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마치도 개그 프로그램 한 코너를 보고 있는 기분입니다.
수제자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는 순간입니다.
갑자기 불어 닥친 역풍과 높은 파도 앞에 좌충우돌하면서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사도단의 결핍되고 불완전한 모습과 자연현상마저 좌지우지하시는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특별한 이 에피소드는 주님 부재시 인간의 현실은 얼마나 어둡고 나약한지, 얼마나 허망하며 절망적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할 때 인간은 또 얼마나 밝고 화사해지는지?
또 얼마나 영원하며 희망적인지를 알게 합니다.
주님 없이 인간끼리 뭔가 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혼돈과 무질서, 절규와 아우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가 탄 배 위로 승선하실 때 즉시 다가오는 것이 잔잔한 평화와 치유, 충만한 구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께로 시선을 고정시켰을 때, 용감하고 씩씩하게 물위를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선을 내려 깊은 물 속을 바라볼 때, 갑작스레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만 바라볼 때 강건해집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아래로만 향할 때, 세상만 바라볼 때, 나 자신만 바라볼 때, 즉시 두려움 투성이의 나약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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