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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4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8-04 조회수 : 348

학창 시절을 생각하면 선생님들이 참 많이 혼내셨던 것 같습니다. 늘 손에는 체벌할 몽둥이가 들려 있었고, 실제로 저 역시 많이 맞았습니다. 스스로 화를 참지 못해서 고함을 지르고 욕을 하는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우리는 모두 그러려니 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에 자극되어 더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큰 상처를 받았고 기가 죽어서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와 다른 친구가 상처받은 친구에게 “신경 쓰지 마. 원래 저런 분인데 뭐~~~”라고 이야기해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자퇴해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우리는 이 친구가 유별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쌍둥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누구는 한 마디에 힘을 얻기도 하지만, 누구는 똑같은 말에 절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일반화를 시켜서 대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에 맞춰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했을까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의 권능에 경탄하여 찾아온 것이 아니라, 따지려는 마음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어깁니까?”라고 묻지 않고,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라고 말한 것을 볼 때, 하느님 계명이 아니라 조상들의 관습을 어긴 것 때문에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과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과 다르다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의 방식은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다름을 모두 인정하셨습니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다름을 인정하면서 사랑을 주셨습니다. 많은 병자를 만나면서 보여주셨던 치유의 방식이 모두 다른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이렇게 다가서야 하지 않을까요? 나의 기준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고유한 모습에 집중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데 최선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때,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의 하느님이라 말할 수 있게 됩니다(예레 30,22 참조).

내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주님과도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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