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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12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08-12 조회수 : 376

어느 성당을 다니는 한 자매님께 구애를 한 세 청년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시인이고, 또 다른 한 명은 가수였으며, 마지막 한 명은 화가였습니다. 각자 자신의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이 자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시인은 멋진 시로, 가수는 사랑의 노래로, 화가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매는 누구를 선택했을까요? 누구의 사랑이 제일 크다고 느꼈을까요? 이것만으로는 그 누구를 특별히 선택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셋 다 사랑의 표현만 다를 뿐 모두 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 표현도 다양합니다. 누구는 봉사와 희생으로, 누구는 기도와 묵상으로, 누구는 자선과 기부로…. 이 모든 사랑이 다 똑같이 중요하고 큰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모습의 사랑이든 상관없이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것만 더 크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착각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를 판단하고, 다른 이를 형편없는 모습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사랑을 깎아내리는 모습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혼내신 것입니다.

고유한 사랑의 방식. 각자가 보이는 사랑의 색깔을 서로가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 마음을 모아서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화합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망과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결국 우리 탓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이나 삶의 방식에서 일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만 맞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 나의 사랑만 크고 남의 사랑은 볼품없다는 잘못된 생각 등으로 인해 진정으로 일치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형제가 죄를 지을 때 먼저 단둘이 만나서 타이르고, 말을 듣지 않으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하지요.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때 교회에 알리라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어떻게든 일치하도록 노력하라는 의미입니다.

나와 다르다면 그냥 포기하고 상종도 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방식은 주님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일치할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우리가 될 때, 그 자리에 주님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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